요즘 충북 청주시에서는 신간 서적 수백 점을 한꺼번에 선보이는 도서전시회가 열리고 있다. 그런데 전시회에 얼굴을 내민 도서는 전문 작가의 작품이 아니고, 홍보용이나 판매용도 아니다. 책을 쓴 이는 주부 학생 회사원 자영업자 등 난생 처음 책을 내는 초짜 작가들이다.
"우아~ 언니가 만든 책이다"
구랍 30일 청주시 흥덕구 운천동 청주고인쇄박물관 기획전시실. 유치원에 다니는 여동생(6)이 전시대에 놓인 동시집 <색종이 접기> 를 집어 들고 소리를 지르자 황유빈(8ㆍ청주산성초 2년)양은 얼굴을 살짝 붉혔다. '아빠와 팔씨름을 했다. 아빠는 나보다 힘이 세다. 나는 아빠보다 힘이 약하다. 그런데 내가 이겼다. 이상하다.' 동시 한 편을 조용히 읽어 내려가던 엄마 김영숙(39)씨는 황양의 머리를 연방 쓰다듬었다. "우리 딸이 이렇게 표현력이 뛰어난 줄 미처 몰랐네. 책 낸 거 진심으로 축하한다." 색종이>
전시실 다른 한 켠에서는 수필집 <사는 게 이런 거여> 를 펴낸 주부 윤현순(63)씨가 이웃 주민으로 보이는 아줌마 부대 예닐곱 명에 둘러싸인 채 기념 촬영을 했다. 고인쇄박물관 큐레이터 김세정(37)씨는 "평범한 시민들의 책 전시회이기 때문에 저자의 가족 친지 친구들이 많이 온다"며 "관람에 크게 방해가 되지 않으면 사진 촬영을 허용한다"고 말했다. 사는>
전시회에 책을 출품한 사람은 줄잡아 500여 명. 저자들은 초등학생부터 80대 노인까지 남녀노소가 따로 없고 직업도 다양하다. 책을 낸 사연도, 장르도 가지 각색이다.
한상희(76)씨는 일찍 남편을 저세상으로 보낸 뒤 꿋꿋하게 자식을 키운 친정어머니와 자신의 빼닮은 삶을 그린 자서전 <억새풀 연가> 를 썼다. 예전에 글을 써 본 적이 없는 한씨는 주민자치센터에서 운영하는 취미교실에서 글쓰기를 배워 책까지 냈다. 한씨는 "올해에는 글공부를 더 열심히 해서 아들과 손주들의 이야기를 담은 전기를 써 볼 생각"이라고 했다. 억새풀>
열쇠 수리공인 심태영(61)씨는 <천형의 나그네 되어> 란 영화 시나리오를 냈다. 고아, 한센병 환자 등의 고된 삶과 비극적 사랑을 담았다. 초등학교를 다닌 게 학력의 전부인 심씨는 "청년 시절부터 시나리오 작가가 꿈이었지만 생계 때문에 엄두도 내지 못했다"며 "40년 동안 구상해 온 내용을 책으로 정리하고 나니 평생의 한이 풀린 것 같다"고 소감을 밝혔다. 천형의>
현직 교사의 히말라야 오지 마을 탐험기, 60대 베트남 참전 용사의 참전 수기, 원로 목사의 시집, 40대 주부의 카툰집, 초등학생의 창작 동화집, 80대 할아버지의 칼럼집 등 예비 작가들의 작품은 다채롭기만 하다.
청주시만 할 수 있는 일
이들이 자신만의 소중한 책을 갖게 된 것은 '청주 시민 1인 1책 펴내기 운동'에 참여한 덕분이다. 시는 이 지역이 세계 최고(最古) 금속활자본 직지심체요절이 간행된 인쇄 출판의 본고장임을 널리 알리고 책 읽는 도시를 만들기 위해 이 운동을 2007년부터 범시민 운동으로 시작했다.
책 펴내기는 시민이면 누구나 도전할 수 있다. 원고를 내면 전문가들로 구성된 심사위원회가 출판 여부를 결정한다. 특별한 문제가 없으면 1인당 10권을 발간하는 비용(약 20만원)을 시 예산으로 지원한다. 분량 내용 장르에는 아무런 제약이 없다.
물론 원고 채택과 함께 바로 책을 낼 수 있는 건 아니다. 출간 대상자로 선정된 사람은 꼬박 1년 동안 글쓰기강습을 거쳐 원고를 가다듬어야 한다. 강습은 금천동 내덕동 사직동 등 15개 주민센터와 시립정보도서관, 기적의도서관, 청주문화의집을 포함해 모두 21곳에서 청주문인협회 소속 작가들이 무료로 해 준다. 작가들은 각자 써 온 글을 평가해 표현력을 길러 주고, 글쓰기 및 출판 기초 요령도 가르친다.
400쪽이 넘는 장편 과학 소설 <라뿌리, 천 년을 흐르는 바람> 으로 2009년 최우수시민작가로 뽑힌 서석용(68)씨는 개신동 둥둥도서관에서 글쓰기 강습을 받으며 9차례나 수정을 거쳤단다. 라뿌리,>
핵기술자가 시간 틈에 빠져 예수 시대로 돌아가 화약을 만들려는 사람과 만나면서 겪는 모험을 흥미진진하게 엮은 서씨는 "꿈속에서 자꾸 새로운 줄거리가 펼쳐지는 바람에 친목 모임에도 못 나가고 1년을 오롯이 글쓰기에 골몰할 수밖에 없었다"며 "머릿속의 생각을 글로 정리하는 과정은 고통스럽지만 즐거운 경험이었다"고 말했다. 물리학자 출신인 그는 "다음에는 주부들도 쉽게 읽을 수 있는 물리학 책을 펴내고 싶다"고 했다.
수곡동주민센터에서 글쓰기 지도 강사로 활동하고 있는 작가 김정자(65)씨는 "어느 40대 주부는 지병으로 숨진 남편의 유작 시집을 내겠다고 2년 동안 한번도 거르지 않고 글쓰기교실을 나오고 있다"며 "자기 표현을 원하는 사람이 많다는 사실을 새삼 알게 됐다"고 말했다.
1인 1책 펴내기 운동 참여자가 갈수록 늘고 있다. 첫 해 300여 명에서 지난해엔 1,000명을 넘어섰다. 지금까지 책을 낸 사람이 2,190명에 이른다. 운동을 주관하고 있는 청주 고인쇄박물관은 연말이면 공동출판기념회를 열어 우수 작품을 시상하고 전시회도 연다. 출간된 도서는 시립정보도서관에 비치해 대여도 해 준다. 시는 올해 상반기 중 개관하는 상당도서관 1층에 1인 1책 펴내기 도서 전용 공간도 꾸밀 참이다.
고인쇄박물관 직지사업팀 직원 왕종필씨는 "골목과 골목, 사람과 사람들의 이야기들이 다양한 책으로 나오면서 지역 문화가 더욱 풍성해지고 있다"며 "시민 모두가 작가가 되는 날까지 책 펴내기 운동을 계속하겠다"고 말했다.
글·사진 청주= 한덕동기자 ddhan@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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