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명박 대통령은 어제 새해 첫 업무를 시작하는 국민들에게 '더 큰 대한민국'의 비전을 선물했다. 글로벌 경제위기와 환경위기를 맞아 새로운 세계질서를 모색하는 역사의 길목에서 선진 일류국가로 도약하는 길과 과제를 담은 이정표를 제시한 셈이다. 특히 이 대통령은 금년을 '임기 중반을 통과하는 해'라고 표현하며 새해 화두로 삼은 '일로영일(一勞永逸ㆍ지금의 노고를 통해 오랫동안 안락을 누린다)'의 자세를 강조했다.
퇴행적 '我生문화' 폐해 심각
새해 벽두부터 대통령의 각오를 밝힘으로써 사회 곳곳에 긴장을 불어넣고 섣불리 레임덕이라는 말이 나오지 않도록 집권 중반기를 관리하겠다는 계산이 읽힌다. 연말 국회 파행으로 빚어진 어수선한 정국 분위기를 제압하는 국면 반전의 효과도 기대했을 법하다. 그렇다 해도 국가지도자가 높아진 국격을 앞세워 희망의 메시지를 국민들에게 심어주고 국정의제를 명확하게 제시한 뜻이 희석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이처럼 임기를 관리하고 국정과제를 추진해야 할 집권그룹과 주변의 우파세력이 그럴 정도의 깊은 생각과 넓은 마음을 가졌는지는 의문이다. 다양성을 존중하고 자신과 다른 입장을 배려하며 신뢰 인프라 축적을 주도해야 할 사람들이 아직도 툭하면 좌파정권 10년을 탓하며 줄 세우기 문화에 맛을 들이니 말이다."올해가 저물 때 서민들의 삶에 온기가 돌고, 대한민국의 국격이 한층 향상되도록 최선을 다하겠다"는 대통령의 다짐이 선뜻 와 닿지 않는 것은 이런 까닭이다.
최근 만난 전문직 인사의 얘기는 희화적이다. 세종시와 4대강 사업에 정통한 그는 "요즘 학계나 국책연구원 등 전문지식층의 코드는 '아생(我生)', 한마디로 정리된다"면서 "말 그대로 내가 먼저 살아야 한다는 것이고 그러기 위해선 어떤 주문도 감내해야 한다는 분위기"라고 말했다. 주요 국책연구원의 연구결과가 전과 다르게 뒤바뀌고 과장되는 것도 '아생문화'의 산물이라는 것이다.
그는 또 "공공정책은 무조건 선하다고 생각하는 공무원들의 인식이 MB정부 들어 더욱 강화됐다"며 "희생되는 기회에 대한 개념, 즉 기회비용 개념이 빠진 사업은 성공하기 힘들다"고 말했다.
정부가 얼마 전 발족한 대통령 직속 사회통합위원회 참여 제의를 거절했다는 한 지인은 구태의연한 정부의 발상과 태도를 꼬집었다. 좌우 진영의 명망가들을 끌어들이고 5개 정권을 넘나든 전직 총리를 얼굴로 내세워 통합이라고 치장하는 꼬락서니가 우선 우습고, 위원(48명)과 지원인력을 합쳐 130명에 가까운 위원회를 꾸리는 것이 낯뜨거웠다는 것이다. 자신들끼리도 소통하지 못할 사람들이 모인 곳에 들러리 서봐야 관리들 좋은 일밖에 더하겠느냐고 판단했다는 얘기다.
그가 이 정부의 위원회를 싫어하는 이유는 또 있다. 대통령이 참석하는 어떤 모임에 갔더니 참여정부의 정책을 조언했던 사람들이 앉아 제 얼굴에 침 뱉기 식으로 과거 정책을 맹비난하는 것을 보고 인간적 회의마저 들었던 까닭이다.
전문지식층의'아생문화'는 파생, 변종 등으로 진화하며 사회 곳곳으로 번지고 있다. 괜히 잘못 나섰다가는 괘씸죄에 걸리거나 본보기로 지목돼 왕따가 되기 십상이니 영혼 없이 살거나 입을 닫는 것이 상책이라는 심리다. 시쳇말로 정권이 출범 2년 만에 가장 '업'된 지금, 사회통합위가 이런 문제를 제기할 리도 없다. 국격이 높아졌다고 앞다퉈 말하지만 그것을 뒷받침하는 인격은 관심 밖이다.
우파 독식으론 '큰 한국' 못 돼
이런 모습으로는 '어음'만 남발하는 보수 헤게모니의 지속은 결코 가능하지 않다. 청렴과 함께 보수세력의 덕목인 관용 존중 배려 겸손 등이 있어야 할 자리에 성찰 없는 자부심과 자신감만 가득해서다. 대통령이 우파독식 문화의 최면에 빠진다면 그가 꿈꾸는 대한민국 건설도 신기루에 그치기 쉽다. 그에 대한 반발이 터져나올 계기는 세종시, 4대 강, 여야 긴장 등 도처에 널려 있고 지방선거는 레임덕의 가늠자가 될 것이다.
비판세력이 대통령의 새해 연설을 냉소적으로 흘려 보내더라도, 보수우파 진영은 행간을 정확히 읽고 정치적 힘의 원천과 무상함을 다시 생각해봐야 한다.
이유식 논설위원 ysle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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