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청각장애인에 저렴한 보청기를… 보람이 커가는 소리 들려요"
지난달 29일 서울 마포구 '강북창업지원센터'의 한 사무실. 창업을 준비 중인 이들이 모인 4개 부스 중 한 곳에서 김정현(24)씨와 유병곤(24)씨가 햄버거로 저녁을 때우고 있었다. 아무렇게나 쓸어 넘긴 머리카락이며 보송보송한 앳된 얼굴은 대학생 티를 못 벗은 모습이지만, 안경 너머 눈망울에선 제법 사업가다운 도전적인 눈빛이 번득였다.
포부도 당찼다. "한 달 수입이 100만원이든 150만원이든, 사회적으로 의미 있는 일을 하는 회사를 차리고 싶다"는 김씨. 아직 책상 두 개와 컴퓨터 두 대 밖에 없는 10㎡의 초라한 일터지만, 창업을 목전에 둔 그들의 부스엔 젊은 세대가 상실한 꿈들이 맥박 치는 듯했다.
스펙을 박차고, 창업기획에 매달리다
토익 준비, 학점 관리 등 취업 준비에 여념이 없을 대학 4학년이건만, 이들에게 스펙 관리는 남의 일이다. 지난해 1월부터 김씨와 유씨 등 대학생 6명이 모여 24시간 카페나 하숙방 등에서 밤을 새며 매달린 것은 토익 시험지 따위가 아니었다.
해외 사례를 연구하면서 쓰고 지우기를 반복하며 만든 '창업기획서'를 들고, 지방자치단체 창업대회 등 각종 창업 공모전을 쫓아다녔다. "누구는 학점 올리고 토익 점수 올릴 때 이런 일 하고 다니면, 다른 애들과 격차가 더 벌어지는 것 아닌가 싶어 걱정도 많았어요."(유병곤씨)
"그냥 공부하면 안정적인 길이 있다"는 선배들의 걱정 어린 조언은 그나마 나은 편이었다. "너희가 무슨 기술이 있다고 창업이냐" 는 어른들의 구박에서부터 "너희 다단계 아니야?"라는 친구들의 냉소까지, 주변의 시선은 곱지 않았다. 그럴수록 그들은 "어디 던져놔도 살아남을 수 있는 야생초가 됐다"고 한다.
"오히려 목표가 분명해지니까 공부가 더 잘됐어요. 일을 하다 보니 영어가 필요해서 더 악착같이 배우고. 처음엔 사업계획서 한 장 쓰는 것도 힘들었지만, 교수님 변호사 변리사 앞에서 프리젠테이션을 자꾸 하다 보니까, 지금은 학교 리포트는 우습게 보여요." (김정현씨)
지난해 6월 이들의 창업계획서가 결국 서울시 '2030 청년 창업 프로젝트'에 선정돼 지금의 사무실을 배정 받았고, 월 70만원의 활동비도 지급받게 됐다. 창업의 문이 성큼 앞으로 다가온 것이다.
'이익 창출'과 '사회 기여' 두 토끼를 쫓다
이들이 준비하고 있는 사업은 보청기 제작ㆍ판매다. 보청기의 현 시장가격은 150만~200만원대지만, 유통과정에서 수입업체, 병원, 소매상의 마진이 추가되면서 상당한 거품이 끼어있다는 게 이들의 판단이다.
특히 청각장애인 중 기초생활수급자의 경우 보청기 구입시 정부보조금을 받긴 하지만, 34만원밖에 안 돼 보청기 구입은 엄두도 못 내고 있다. 이처럼 비싼 가격 탓에 보청기를 못 쓰는 저소득 청각장애인이 8만명에 달한다. 시장 수요는 충분하다는 것이다.
김씨는 "보청기는 장애인 보장구이기 때문에 비싸면 안 되지만, 국내 보청기 시장이 많이 왜곡돼 있다"며 "보청기 가격을 낮추려는 우리 사업이 성공한다면, 저소득 청각장애인들에게도 많은 혜택이 돌아갈 수 있다"고 말했다.
관건은 역시 보청기 가격을 어떻게 낮추느냐는 점이다. 이들은 기존 보청기에서 필요 없는 사양을 제외한 제품을 주문자상표부착생산 (OEM) 방식으로 주문 제작하는 한편, 수입업체ㆍ의사 등의 유통 마진을 없애면 34만원 가격의 보청기 판매가 가능하다고 보고 있다.
실제 지난해 말에 이 가격대로 시범적으로 제품을 주문 생산하는 데 성공해 6명에게 판매했다. 이 가격대가 정착되면 저소득 청각장애인들은 정부보조금만으로도 보청기를 구입할 수 있고, 이들로서도 저소득 청각장애인들을 고스란히 수요자로 삼을 수 있게 돼 일거 양득이다.
이들이 준비 중인 회사 이름은 '기쁨을 주다'는 뜻의 딜라이트(delight). 이달 말께 법인 등록을 마치고 회사 홈페이지를 만든 뒤 본격적인 사업에 들어갈 예정인데, '딜라이트'는 앞으로도 변치 않을 그들의 창업정신이다.
김씨는 "보청기를 싼 값에 시험 판매했을 때, 한 장애인은 눈물을 흘리며 구입하기도 했다"며 "우리의 조그만 노력이 누군가에게 큰 기쁨이 될 수 있다는 게 행복했고, 일하는 원동력이 되기도 했다"고 말했다.
이들은 실제 6개월 정도 실적을 낸 뒤 이윤의 3분의 2 이상을 사회에 환원하는 사회적 기업으로 노동부에 승인을 받을 예정이다. 명실상부 '이윤'과 '사회기여'의 두 마리 토끼를 쫓는 사회적 기업으로 성장하겠다는 포부다.
20대에게 창업은 어쩌면 무모한 도전이지만, 이들은 오히려 즐거운 특권이라고 말한다. "도전하지 않고 따라만 가는 것은 젊음의 혜택을 외면하는 것이죠. 창업을 준비하면서 도서관에서는 배울 수 없는, 많은 것들을 배웠습니다."(김씨) "인생은 여행이라고 생각해요. 길을 가다가 재미있어 보이는 일이면 뭐든 뛰어드는 거죠. 창업도 마찬가지입니다."(유씨)
김경준기자
김혜영기자
■ 사회적 기업 창업하는 젊은이들
취약계층에 상품이나 서비스, 일자리 등을 제공하거나 수익의 일부를 사회에 환원하는 사회적 기업은 고학력 청년층의 일자리 창출 대안으로 이미 주목 받고 있다. 청년층의 취업 만족도를 높일 뿐만 아니라 회계, 마케팅 등 경영에 필요한 인력의 고용이 활성화해 청년실업해소에 크게 기여할 수 있다는 점 때문이다.
지난해 12월까지 노동부가 인증한 사회적 기업은 총 266개, 아직 인증을 못 받은 예비 사회적 기업을 포함하면 500여개로 이중 상당수가 청년층으로 구성된 사업체로 파악되고 있다. 사회적기업지원네트워크 정선희 이사는 "정확한 통계는 없지만 최근 경향을 보면 사회적 기업에 청년들의 참여가 눈에 띄게 늘었다"고 말했다.
청년들이 사회적 기업 창업에 나서는 이유는 임금, 명성 등 외형적 보상보다 일의 보람, 자아실현 등과 같은 내재적 보상이 높은 일자리를 찾기 때문이다. 실제로 통계청에 따르면 지난해 20대 청년층 가운데 내재적 보상을 우선해 직업을 선택하는 사람의 비율은 38.2%로 50대(19%)보다 두 배 가량 높았고 40대와도 크게 차이가 났다.
이 때문에 정부는 청년실업 해소 차원에서 사회적 기업을 대폭 늘리겠다는 계획이다. 서울시와 경기도 등도 청년들의 사회적 기업 창업을 지원하는 계획을 마련해 두고 있다.
하지만 전문가들은 청년들의 사회적 기업 창업에 신중을 기해야 한다고 경고하고 있다. 김영문 계명대 교수는 "별다른 창업 준비 없이 창업을 선택한 이들은 노동시장에서 쉽게 퇴출될 가능성이 높다"며 "특히 청년층은 자본과 경험, 노하우가 부족해 주의해야 한다"고 말했다.
김혜영기자
■ 현장에서
● 가진 건 책상과 컴퓨터뿐, 하지만 청사진은 뚜렷했다
취업전쟁은 힘겹다. 그렇다고 새로운 길에 도전하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다. 누구나 한번쯤 자신만의 사업에 뛰어드는 상상에 빠질 수는 있지만 실제 자신이 일자리를 창출한다는 것은 청춘의 용기만으로 뛰어들기에는 큰 모험이다. 모험으로 끝이 날 선택에 자신의 인생을 걸 수 있는 젊은이들이 얼마나 될까?
딜라이트를 만나며 희망을 발견한 까닭은 그들의 대안이 단순한 모험을 넘어서기 때문이다. 가진 것은 두 개의 책상과 컴퓨터뿐이었지만 그들이 준비한 그들의 청사진은 뚜렷하고 분명하다. 사업모델은 경쟁력 있고 접근 방법은 참신했다. 수 개월간 잠을 줄이고 끼니를 거르며 사업을 기획했고 많은 이들 앞에서 발표하고 검증 받았다. 준비돼 있기에 그들은 "지금 즐거운 여행을 떠날 참"이라고 자신 있게 말했다.
그들은 늘어난 청년 창업지원책을 기회로 봤지만, 촘촘한 창업 교육의 부재를 아쉬워했다. 경영학 교과서 바깥의 세상을 제안하고 지도해줄 진정한 지원군이 늘어나야 더 많은 청춘들이 기꺼이 창업에 도전할 수 있지 않을까.
김혜영기자
● '안정' 외의 것은 잘못이란 사회 분위기가 창업 걸림돌
새가 알을 깨고 나오기 위해서는 어미가 알을 품어줘야 한다. 하지만 그게 다는 아니다. 알 속의 새끼 새도 부지런히 부리로 알을 쪼아야 한다. 이 두 노력이 맞물렸을 때 새끼 새는 새로운 세상을 경험할 수 있다.
청년실업 문제에 있어 우리 사회에는 알을 품어주는 어미 새도, 알을 깨고 나오려는 새끼 새도 찾기 힘들다.
'안정적인 직업 구하기'는 시쳇말로 청년들의 '로망'이다. 다들 하니 나도 하는 식이다. 사회도 '대세'라는 이름으로 젊음을 짜인 틀에 가둔다. 딜라이트의 주역들도 도전에 부정적인 사회 분위기를 청년 창업의 가장 큰 걸림돌이라고 꼽았다. '안정'이 나쁜 게 아니라 '안정 외의 것'이 잘못이라고 인식하는 게 나쁘다.
딜라이트의 패기에 찬 도전을 보며 젊음이 가진 희망을 생각했다. 쉴 새 없이 세상을 향해 부리를 들이대는 그들. 그들은 인생을 즐기면서도 세상에 도전장을 내밀만 한 깜냥도 갖고 있었다. '앙팡테리블'이 하루빨리 알에서 깨어나길 기대해 본다.
김경준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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