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달 천하'였다. 불과 한달 전(12월3일) KB금융지주 회장 내정자로 결정되며 마침내 'KB 1인자'에 오르는 듯 했던 강정원 국민은행장의 욱일승천 기세는 결국 해를 넘기지 못하고 끝났다. 금융권은 이번 사태가 가져올 거대한 후폭풍을 염려하고 있다.
당국 변수에 발목
강 행장의 회장 내정자 선임 직후, 금융권은 그의 저력과 뚝심에 찬사를 보내면서도 '금융당국과의 관계 회복'을 제1 과제로 꼽았다. 막판 두 경쟁 후보(이철휘 자산관리공사 사장, 김병기 전 삼성경제연구소장)가 선임 과정의 불공정성을 불평하며 경쟁을 포기하면서 당국은 여러 채널을 통해 '주총을 서둘지 마라'는 경고성 메시지를 보낸 것으로 알려졌으나 KB측은 절차 강행을 택했다.
결국 당국과의 마찰이 발목을 잡았다. 당국은 지난 16일부터 KB지주와 국민은행에 대한 고강도 사전검사에 나섰다. 통상의 자료요구 수준을 넘어, PC를 대거 압수하고 행장 운전기사까지 면담하며 사외이사와 강 행장의 문제 소지를 집중 공략했다. 압박의 강도가 갈수록 심해지자, 강 행장도 결국 '백기'를 든 것으로 보인다.
강 행장은 31일 사퇴의 변을 통해 "KB지주를 아시아 최고 금융그룹으로 키워보겠다는 순수한 일념으로 회장후보 인터뷰에 응했고 회장 공백기를 최소화하자는 이사회의 뜻을 받아 내정자 선출을 받아들였지만 선임 절차가 불공정했다는 비판 여론 속에서 계속 선임 절차에 참여하는 것이 주주와 고객 이익에 부합되지 않는다고 생각해 심사숙고 끝에 결단을 내렸다"고 밝혔다.
길고 깊을 후유증
이번 사태는 KB 내부는 물론, 금융권 전반에 깊은 '상처'를 남길 것으로 보인다. 우선 당분간 KB지주와 국민은행의 경영공백 상태는 불가피하게 됐다. KB지주는 새해 들어 외환은행 인수 등 그 동안 밝혀 왔던 굵직한 경영 현안들을 추진할 계획이었으나 이를 끌고 나갈 선장을 잃었기 때문이다. '큰 손' KB가 빠진 금융권 인수ㆍ합병(M&A) 시장이 제대로 작동할 지도 의문이다.
사실상 당국의 압박으로 물러난 강 행장이 국민은행 경영을 소신 있게 수행하겠느냐는 우려도 많다. 강 행장은 이날 "주어진 기간 동안 국민은행장 및 회장 직무대행으로서 소임을 다하기로 했다"며 일단 행장직은 유지할 뜻을 내비쳤지만, 일각에서는 당국과의 불편한 관계로 강 행장이 올 10월까지인 은행장 임기마저 마치기 어려워지는 것 아니냐는 전망마저 제기되고 있다.
금융권에서는 차기 회장이 3월 정기 주총에서 새로 선임될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보고 있지만 시간적 여유도 많지 않은 상황이다. 새로 공모 절차를 거쳐야 하지만 금융당국이 곧 발표할 사외이사 제도 개선안에 맞춰 KB지주 사외이사진의 변화가 불가피하고, 이에 따라 회장후보추천위원회 구성도 당분간 늦어질 수밖에 없다.
무엇보다 큰 상처는 금융권 전반에 미칠 '관치 공포'다. 당국은 "예정된 업무만 했을 뿐 영향을 끼친 바 없다"고 말하지만, 이를 그대로 믿는 금융인은 별로 없다. 정부 지분이 단 1주도 없는 민간은행의, 선임 과정상 특별한 하자가 없는 인사였는데도 금융감독 권한을 앞세운 정부의 입김이 결과를 뒤집은 셈이라는 해석이 지배적이다. 권영준 경희대 교수는 "이번 사건은 관치금융의 전형"이라며 "국내 금융시스템은 수십 년 전으로 후퇴한 셈"이라고 비판했다.
외국인 지분이 높은 KB지주가 이미 해놓은 주총 공고까지 뒤엎게 되면서 앞으로 상당기간 이미지 손실도 불가피해졌다는 우려도 높다.
김용식 기자 jawohl@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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