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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광식 국립중앙박물관장의 잉카문명 이야기] <4·끝> 잉카문명의 미스터리를 찾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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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광식 국립중앙박물관장의 잉카문명 이야기] <4·끝> 잉카문명의 미스터리를 찾아서

입력
2009.12.31 06: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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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카 문명의 유적지와 유물들을 보면 많은 의문들이 꼬리를 물게 된다. 잉카의 수도 쿠스코의 거대한 삭사이우아만 성채와 마추픽추 유적들의 석조건축물, 모레이 농업작물시험장의 계단식 시설, 고산지대에 있는 염전, 앉아있는 미라, 해골에 보이는 외과 수술의 흔적 등 상식적으로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미스터리가 줄을 잇는다.

잉카 제국은 4개 지역 세력의 연맹체로서 1430년에 성립되었다. 쿠스코에 수도를 정하고 강력한 왕권으로 각 지역세력을 통제하며 새로운 문명을 발전시켜 나갔다. 태양의 신전을 통해 잉카의 왕은 태양의 아들이라는 것을 내세워 왕권을 강화해 나갔다. 또 잉카의 왕이 태양의 아들이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태양의 움직임을 관찰해 시간을 측정했으며 일식이나 월식을 예견하기도 했다.

제국의 수도였던 쿠스코는 크게 하난쿠스코(높은 쿠스코)와 후린쿠스코(낮은 쿠스코)의 두 지역과 13개의 작은 지역으로 나뉘어졌다. 쿠스코에는 많은 벽돌집들이 있었으며 잉카의 왕궁은 금은 박판으로 선을 두른 석재로 벽을 만들었다. 거리는 깨끗하게 포장되어 있었고, 상하수도 시설까지 갖추고 있었다. 쿠스코 지역의 벽은 핀조차 들어가지 않을 정도로 정교히 짜맞춰진 돌들로 세워졌다.

잉카 건축의 가장 큰 특징은 여러가지 크기의 돌들을 서로 완벽하게 들어맞도록 정교하게 다듬어 쌓아 올렸다는 데 있다. 1950년 쿠스코를 덮친 대지진 때 스페인의 정복자들이 건설한 건축물은 파괴됐지만 잉카인이 만든 건축물들은 거의 피해를 입지 않았을 만큼 튼튼한 구조를 지니고 있었다.

가장 중요한 요새인 삭사이우아만 성채는 쿠스코 뒤편 언덕 꼭대기에 자리 잡고 있었다. 쿠스코에서 북쪽으로 3㎞ 떨어져 있는 산 정상에 있는데 그 모습이 마치 아테네에 있는 아크로폴리스와 같았다. 해발 3,700m인 이 성채에 오르자 숨이 가빠지고 속이 울렁거리는 느낌이었다. 요새는 세로로 긴 지그재그 형태를 한 3단의 성벽으로 이루어져 있다. 각각의 단은 그 길이가 300m가 넘는다.

성벽을 이루고 있는 수십, 수백 톤에 달하는 거대한 돌들은 위로 갈수록 작아지는데 가장 아랫단의 돌들 가운데는 그 높이가 9m에 달하는 것도 있다. 우리나라 고인돌의 몇 배나 되는 규모다. 성벽에는 가장 아랫단에서 윗단에 이르는 세 개의 출입문이 있으며, 꼭대기에는 세 개의 탑이 있다. 거대한 돌 하나하나를 주변 바위의 모양에 맞추어 세밀하게 깎고 다듬어 올렸다.

바퀴와 같은 운송수단이나 철제로 만든 도구가 없었던 잉카에서 이렇게 정교한 석조물을 축조하기 위해서는 축적된 기술과 많은 인력, 그리고 많은 시간이 소요되었을 것이다. 문자도 없는 상황에서 이러한 기술을 어떻게 전수하였는지 정말 모를 일이다.

삭사이우아만 유적이 군사적인 방어 요새인지 또는 종교적인 유적인지에 대해서는 논란이 많다.일부 고고학자들은 태양을 모시는 왕실 건축물이었다고 주장하고 있는데 사실 고대사회에서 왕권을 차지하고 유지하는 데 있어 제사권과 군사권은 동전의 양면과 같은 것이다. 따라서 삭사이우아만 유적은 군사적 요새와 제의적 공간의 성격을 모두 갖고 있다고 할 수 있다. 한국 고대의 유적에서도 군사와 제사의 유적이 결합되어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제사권이 왕권을 정신적으로 유지해주는 기반이라면 군사권은 왕권을 물리적으로 지탱해주는 기반이라고 하겠다.

왕권이 유지되기 위해서는 경제적 기반도 중요하다. 잉카는 농업을 기반으로 하는 사회이기 때문에 농업생산의 발전이 가장 중요한 경제적 기반이 되었을 것이고, 제국은 농업의 발전을 위한 여러 가지 방안을 강구하였을 것이다. 모레이 농업작물시험장이 이를 보여주는 대표적 유적이다. 감자와 옥수수의 품종을 개량하여 그 종자를 백성들에게 나누어줌으로써 농업 생산력을 발전시키고, 확대된 농업생산력을 기준으로 조세를 받아 제국의 경제적 기반을 강화시켜 나갔던 것이다.

또한 소금 염전을 독점적으로 장악하여 이를 지역세력과 백성들을 통치하는 수단으로 활용했다. 이 지역은 해안에서 멀리 떨어져있어 소금을 얻기 어렵기 때문에 소금의 재분배를 통하여 지역 세력을 통치하였던 것이다. 잉카제국이 네 지역의 지역연합세력이었으므로 각 세력을 결속시키고 컨트롤하기 위해 소금을 적절하게 활용했을 것이다.

잉카 문명의 신비는 과학과 기술의 발달에 따른 것이다. 잉카인들은 이집트보다 앞서 미라를 만들었으며, 출토된 해골에 남아있는 외과 수술 흔적은 의학의 발달을 입증한다. 잉카제국은 하드파워 뿐 아니라 소프트파워도 갖춘 스마트파워의 문명국이었던 것이다.

■ 왕위 다툼 혼란속180명스페인군에 어이없이

1532년 피사로가 이끄는 180여 명의 스페인 군대가 페루 해안가에 도착했다. 이때 잉카 사회는혼란에 빠져 있었다. 유럽에서 전파된 천연두가 퍼져 수백만 명의 목숨을 위협하고 있었고, 우아이나 카팍왕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적자인 우아스카르 세력과 서자인 아타우알파 세력 간의 다툼이 이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잉카의 수도 쿠스코에 침입한 스페인 군대는 잉카의 황금에 눈이 멀었고, 잉카의 왕을 쓰러뜨리고 황금을 독차지하겠다는 야망을 가지게된다. 피사로는 우아스카르를 누르고 왕이 된 아타우알파왕과의 회견을 마련한다. 그리고 그들이 건네준 성경책을 왕이 집어던지자 신성모독이라는 핑계로 기습 공격을 감행하여 왕을 납치했다.

스페인 군대에게는 시간이 중요했다. 어떻게든 잉카의 군대가 전열을 갖추기 전에 왕을 제거해야 이국의 땅 쿠스코에서 살아남고 황금을 독차지할 수 있었다. 피사로에게 사로잡힌 아타우알파왕은 석방의 대가로 방 하나 가득히 황금을 줄 것을 약속했다. 그러나 스페인인들은 황금만을 빼앗은 채 1533년 8월 29일 잉카의 왕을 교수형에 처했다.

총과 칼로 무장한 스페인 군 앞에 철제 무기가 없었던 잉카인들은 속수무책이었다. 안데스가 세상의 전부라고 믿었던 잉카는 외부 세계에 대해 경계심이 없었다. 오히려 그들은 얼굴이 하얗고 번개치는 소리(총소리)를 내며 이상한 동물(말)을 타고 있는 스페인인들을 그들의 구세자라고까지 오인했던 것이다.

무엇보다도 잉카인들을 두려움에 떨게 한 것은 사상의 충돌이었다. 스페인인들은 천주교로의 개종을 강요하면서 잉카인들의 신성한 장소였던 신전을 파괴했다. 잉카인들에게 있어 숭배의 대상이자 정신적 구심점이었던 선조들의 미라는 파괴되었고 잉카 제국은 빠르게 몰락했다. 고도의 사회 구조와 행정 체계, 그리고 뛰어난 건축 기술로 거대한 제국을 일궜던 잉카의 최후이자 5,000년 넘게 이어졌던 안데스 문명의 안타까운 마지막 모습이었다.

5만의 병력을 갖고 있었던 잉카제국이 단지 180명에 불과한 스페인 군대를 막아내지 못한 것은 그야말로 내우외환이 겹쳤기 때문인 것이다. 선왕 사후 왕위를 놓고 벌어진 내부 분열은 잉카가 천연두와 스페인 군대의 침략을 이겨내지 못하고 멸망에 이르도록 하고 말았다.

국립중앙박물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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