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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화숙 칼럼] 올해의 이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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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화숙 칼럼] 올해의 이웃

입력
2009.12.31 06: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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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해를 마감하면서 세 분을 올해의 이웃으로 선정해보았다. 이웃에서 쉽게 보는 평범한 사람이지만 공동체를 위해서 비범한 행동을 한 사람들이다.

첫 번째 이웃은 6년 동안 고려대학교 맞은 편 재개발 반대운동을 벌여온 아무개씨이다. 지난 주에 성북구청은 이 재개발안을 공식 반려해서 이제 이 지역에서는 고층 아파트를 건설해서 토박이들을 등 떠미는 재개발이 아니라 주민들의 뜻이 반영되고, 대학가인 지역특성도 살린 마을 가꾸기가 가능해졌다.

재개발 반대ㆍ마을 지키기 앞장

서울에서 재개발은 대형 건설사가 일단 밑밥을 뿌리고, 그 돈을 보고 철거용역업체들이 몰려들어서 지역주민들을 흔들고, 지역주민들이 절반 이상 찬성하면 재개발 조합 추진위원회가 결성되는데, 일단 이 추진위가 결성되고 나면 개별 주민은 뒤늦게 반대하려 해도 빠져나가기 힘들게 된다.

찬성과 반대가 팽팽해서 기간이 늘어지면 찬성 측에서는 그 기간 동안 추진위 혹은 조합이라는 이름으로 쓴 활동비를 벌충하기 위해서라도 반드시 아파트 건설을 성사시켜야 한다. 이 활동비에는 때로는 거액의 뇌물도 들어 있다. 만일 오래 끌다가 불발이 되면 그 돈을 모두 찬성한 주민들이 토해내야 하기 때문에 이래 저래 후유증이 오래 남는다.

나이 드신 어르신들이 재개발에 반대한다는 이유로 용역업체의 협박전화에 시달리는 것을 안타깝게 여긴 아무개씨는 주민들에게 권리를 일깨워주고 재개발의 문제점을 사회에 알리고 대학생들의 지원도 받아내면서 재개발을 막았지만 이런 후유증 때문에 이름조차 밝히지 못한다. 그는 요즘 재개발로 나뉜 주민들의 상처를 봉합하는 법을 찾고 있는데, 이 상처가 봉합되면 마음 편하게 이름을 공개할 수 있을 것이다.

두 번째 이웃은 서울 종로구 부암동에 사는 김병애씨이다. 첫 손자를 봐주는, 중학교사 출신의 전업주부인 그는 동네에 대형 주차장이 들어서는 것을 막느라 올 한 해를 보냈다. 이곳에 대형 주차장이 건설된다는 것은 좁은 골목길이 사라지고 마을이 사람들이 살기 좋은 동네가 아니라 관광객들이 놀러 오기 편한 곳이 된다는 뜻이다. 구청에서, 동사무소에서, 심지어는 국정원 기관원이라는 사람까지 찾아와서 대형 주차장이 들어서면 집값이 오를 것이라고 회유하기도 했다.

그가 구청과 언론사를 뛰어다니며 시작한 반대운동에 지역 주민들이 동참하면서 마을 전체가 변화하기 시작했다. 자연이 좋아서 이사왔지만 섬처럼 외따로였던 마을 사람들은 모임을 만들고, 운동기금모금 음악회를 열더니 마을송년회까지 가졌다. 구청은 주차장터가 안평대군 유적지라는 것이 밝혀지면서 주차장 계획은 보류했지만 그곳에 도로를 확장할 계획은 포기하지 않고 있으니 마을사람들에게는 내년에도 할 일이 많다.

세 번째 이웃은 '나영'양의 아버지이다. 어린 딸에게 닥친 참혹한 일에 그는 굴복하지 않고 개인의 불행을 세상을 바꾸는 불씨로 바꿔놓았다. 그 덕분에 술 마시고 성범죄를 저지른 이에게 심신미약을 이유로 벌을 감형하는 얼토당토 않은 판결이 사라지게 됐으며 성범죄 피해자를 전혀 배려하지 않는 수사방식도 바로잡히게 됐다. 성범죄 피해자의 정신적 상처를 극복하도록 돕는 의사와 아동학자들의 심리치료방안도 등장했다.

이런 노력이 함께 모아진다면

물방울과 추위만으로 눈송이는 만들어지지 않는다. 먼지 한 알갱이가 필요하다. 이 분들 주변으로 부동산 대박 유혹에도 흔들리지 않고 재개발을 반대한 주민들, 대학생다운 공의를 지역주민들과의 유대감에서 찾은 학생들, 돈이 다는 아니라며 소박한 동네를 지키겠다는 마을사람들, 조두순 사건의 문제점을 처음 알린 방송사 제작진, '나영'양 회복에 힘쓴 의사, 함께 분노한 모든 이들이 모이면서 겨울 대지를 적셔주는 눈송이가 만들어졌다. 먼지든, 먼지에 다가가는 물방울이든 좋은 이웃이 되겠다고 다짐하면서 한 해를 마친다.

서화숙 편집위원 hssuh@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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