옷과 통조림의 차이는 무엇일까. 둘 다 유통기한이 있지만 그 유통기한을 정하는 기준이 다른 것이지 싶다. 식품류인 통조림은 제조일을 기준으로 변질 가능성을 판단해 유통기한을 정한다.
반면 옷은 심각한 훼손만 없다면 10년을 한결 같이 입기도 하고 유행의 오고 감에 따라 한 시즌만에 용도 폐기되기도 한다. 유통기한의 기준은 제조일이 아니라 소비자의 선택 여부다.
패션 의류 업계가 지식경제부 기술표준원이 내년 1월 1일자로 시행하는 국가통합인증마크(KC마크)의 섬유 제품 관련 제조일자 표기제 신설에 발끈하고 나섰다. 재고상품이 신상품으로 둔갑(?)하는 것을 근절해 소비자 권익을 보호하기 위한다지만 현실을 모르는 탁상행정이라는 것이다.
안윤정 한국여성경제인연합회 회장은 "의류에 제조일을 표기하는 건 이미 10여 년 전 업계 현실과 맞지 않는다고 폐기됐던 제도며, 세계적으로도 시행하는 나라도 없다. 글로벌 트렌드에도 맞지 않는 제도를 만드는 건 의류 업계 전체를 범법자로 만드는 행위"라며 분통을 터트렸다.
제조 일자 표기제 불가론의 근거는 패션 의류 산업의 특성과 관계 있다. 뉴욕컬렉션을 예로 들어보면 이렇다. 내년 봄ㆍ여름 패션 트렌드를 제시하는 뉴욕컬렉션은 10월 초 열렸다. 컬렉션 참가 브랜드는 패션쇼 직후 전 세계에서 온 바이어들을 상대로 수주 상담을 하고 이를 바탕으로 제품 생산에 들어갔다. 1월 말 늦어도 2월 초에는 첫 선적 물량이 바잉업체에 납품된다.
엄밀히 따지면 2009년 생산된 제품이 2010년에 판매되는 셈이지만 제조 일자를 따로 표기하지 않는다. 제품 주문 및 원단 확보, 제조, 선적에 필요한 리딩 타임으로 보기 때문이다.
더구나 옷 한 벌을 생산하는 데 국경을 넘나드는 건 예사인 글로벌 시대다. 중국산 원단을 수입해 국내서 재단하고 스리랑카에서 봉제한 뒤 다시 국내로 들여와 제품 라벨을 붙여 최종 상품이 완성되는 데 제조 일자를 봉제일 기준으로 할지 라벨 부착 시점으로 할지 조차 명확하지 않다.
김묘환 컬쳐마케팅그룹 대표는 "제조 일자 표기는 불필요한 소비자 오해를 살 수 있다"며 "국산은 물론, 수입 제품에도 적용돼 자칫 국제 무역 마찰로 번질 소지도 크다"고 말했다.
업계가 더욱 분개하는 건 사안의 민감성에도 불구하고 행정 당국이 7월 KC마크 도입을 확정하면서 업계 의견 수렴 절차를 소홀히 했다는 점이다. 한국패션협회 관계자는 "유해물질 규제 강화를 위한 유아용 섬유제품 자율안전 확인제도 관련 공청회가 한 차례 있었을 뿐 제조 일자 표기제 관련해서는 사전 공청회도 없이 일이 진행됐다"고 말했다.
업계 반발이 확산되자 기술표준원은 급히 업계 관계자들과 만나 의견을 수렴하고 유아 섬유제품 자율안전 확인제 시행을 일단 내년 9월로 유보한 상태. 그러나 제조 일자 표기제 관련해서는 여전히 결론이 나지 않고 있다.
시행 유보된 유아용 섬유제품 자율안전 확인제 또한 유해물질 관리 감독을 강화한다는 취지에도 불구, 옷 한 벌에 10만원 내외인 검사 비용을 업체가 모두 지불하도록 함으로써 원가 상승 우려가 커지고 있다.
한 유아 아동복 업체 대표는 "신상품이 아닌 건 똑똑한 소비자들이 먼저 알아보고, 글로벌화한 패션 업체들은 이미 국제 수준의 안전 관리 규정들을 갖고 있다"며 "패션 산업에 대한 정확한 이해가 없는 행정 조치는 패션 산업의 발목을 잡는 행위"라고 성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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