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트남에 다녀왔습니다. 하노이에서 후원하는 한국어 말하기 대회가 있었습니다. 출전 선수들은 진지했고, 응원단은 뜨거웠습니다. 우리에겐 지금 없는 것 같은 순수한 열정을 느꼈습니다. 친구가 잘하면 좋아하고 못하면 아쉬워하는 응원단들을 보면서요.
대상은 달랏이라는 작은 도시에서 온 학생이 받았습니다. 말뿐만 아니라 심사위원들과의 질의 응답에도 아주 명쾌하게 대답을 잘 한 것이 높은 점수를 받은 요인이었습니다. 대상으로 그녀의 이름이 호명되자 2천명이 넘는 관중석은 완벽하게 고요했습니다. 대회 장소가 하노이였습니다. 대부분의 관중은 하노이 사람이었습니다. 북부의 자존심이 무너지는 순간이었나 봅니다.
에너지 넘치는 카오스
이 학생은 내년 9월에 인하대학교로 온다고 합니다. 헤어지는 자리에서 이 학생을 몇 년 간 지도했던 젊은 한국인 선생님이 내 손을 잡고 "우리 제자 좀 잘 부탁하겠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가슴이 뭉클했습니다. 이번 대회를 위해서 예상 질문 리스트까지 작성해서 한 달이 넘게 준비했다고 합니다. 세상 어디서나 훌륭한 선생님들이 있고, 또 훌륭한 제자들이 있습니다.
밤에는 하노이의 거리를 돌아다녔습니다. 오토바이들은 마치 유령처럼 여기저기서 튀어나왔습니다. 신호도 없는 사거리에서는 수천 대의 오토바이들이 사방도 아니고 팔방도 아니고 인간이 생각 가능한 모든 방향에서 튀어나왔습니다. 신기한 것은 아무도 부딪히지 않고 각자의 목적지를 향해 사거리를 빠져나가는 것이었습니다. 오토바이를 탄 사람의 대부분은 10대, 20 대 젊은이들이었습니다. 하이힐을 신고 오토바이를 타는 것이 어색하지 않은 유일한 나라가 베트남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청년 인구의 비율이 압도적으로 높은 나라, 세계 초강대국들과의 전쟁에서 한 번도 패하지 않은 나라, 그러나 람보르기니도 시속 80km 이상의 속도로 달릴 수 있는 도로가 없는 나라. 교차로에서 서로 얽혀 쉼 없이 경적을 울리며 빠져나가는 오토바이들을 보면서 '에너지 넘치는 건강한 카오스'가 지금 베트남의 모습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하롱베이에 갔었습니다. 하롱베이는 아주 오래전 <인도차이나> 라는 영화를 본 이후로 저의 꿈이었습니다. 역시 너무나 아름다웠습니다. 도대체 신은 무슨 맘을 먹고 그렇게 대책 없이 아름다운 점들을 쪽빛 바다 위에 뿌려놓았을까요? 항상 너무나 아름다운 풍경을 보면 뭔가 근본적인 것을 생각하게 됩니다. 알랭 드 보통이 그랬습니다. 인도차이나>
그 진경 산수화 속을 미끄러지는 배 위에서 나의 중년에 대해 많이 생각했습니다. 베트남 학생 몇 명과 기념 촬영을 했습니다. 동행 중 한 분이 저를 영화감독으로 소개하셨기 때문입니다. 영화를 찍어야 할 곳에서 관광사진이나 찍는 초라한 감독이었습니다.
한국 가는 밤 비행기를 타기 위해 공항으로 가는 택시 속에서 동행과 이번 여행을 정리했습니다. 우리의 결론은 다소 엉뚱하게도 인문과학이었습니다. 사실 이 생각은 이번 여행 내내 저의 머리 속을 떠나지 않던 생각이었습니다.
지성과 교양이 국력
도로나 항만, 효율적인 행정 시스템 등의 사회적 인프라 구축에 베트남은 현재 주력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베트남이 할 일은 인문과학에도 있다는 생각이었습니다. 인문과학이 결국 자기 정체성에 대한 끊임없는 고민이라고 한다면 사회주의적 자부심과 실용적 경제논리가 카오스적으로 혼재돼 있는 베트남의 현재에서 인문과학의 역할은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것이었습니다.
지성과 교양은 국력입니다. 그래서 우리도 인문과학을 포기하지 말아야 하는 것이 아닐런지요.
육상효 인하대 교수·영화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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