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여는 백제 성왕 때인 638년 공주에서 수도를 옮겨왔다. 그리고 의자왕 때인 660년 신라와 당나라의 연합군에 의해 120여 년 만에 나라의 운명을 마감했다. 그런데 고대 기록에 남아 있는 궁궐이나 사찰 등 여러 건물들의 정확한 위치가 밝혀진 것은 극히 일부분에 지나지 않고 있다.
기록에 보면 왕흥사는 사비백제시대 임금이 백마강을 건너 자주 찾은 왕실과 관련이 깊은 국찰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언제인지 모르지만 지금은 없어져 버렸고 다만 규암면에 왕은리라고 불리고 있는 마을이 있고 이곳에서 1934년 왕흥(王興)이라는 글자가 새겨진 기와편이 발견되어 일대가 왕흥사 터임을 추측하게 되었다.
절터는 82년에 충청남도기념물 제33호로 지정 보호해 오다 2000년부터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에서 처음 발굴조사를 실시하게 되었고 이듬해 국가에서 사적 제427호로 지정했다. 그리고 올해 제10차년도의 발굴조사가 진행되었다.
지금까지 계속된 발굴조사의 하이라이트는 2007년 10월10일 발견된 사리장엄유물이다. 이 사리장치 유물은 목탑의 중심 기둥이 세워졌던 심초석(心礎石)에 마련된 사리공(舍利孔) 안에서 실로 1500여년간 고스란히 간직되어온 것을 수습함으로써 백제 왕흥사의 실체가 명백하게 드러나게 되었다.
사리를 넣어 보관하는 순금제의 사리병은 높이가 불과 4.6cm에 지나지 않지만 보다 큰 은제의 사리단지(舍利壺)에 담겨있었고 이 은제 사리단지는 청동의 사리합(舍利盒)에 담겨 있어 3중구조로 보존되고 있었다.
무엇보다도 사리합 표면에 29자의 한자를 새겨두어 이 글자를 통해 왕흥사 목탑이 건립된 연유와 연대를 알게 되었다. 즉 577년 2월15일 백제왕 창(昌)이 죽은 왕자를 위해 절을 세우고 본래 사리 둘을 넣었는데 신의 조화로 셋이 되었다는 내용을 기록해 두었다.
창은 웅진(공주)백제에서 사비(부여)백제로 수도를 옮긴 성왕의 아들로서 뒤를 이은 백제 27대 위덕왕(威德王)의 이름이다. 유명한 능산리 백제금동대향로가 출토된 사찰과도 관계가 있는 임금이다.
사리병 발견에 따라 사리병 속에 있어야 할 사리를 확인하기 위해 사리병의 뚜껑을 열어 보았으나 사리는 보이지 않았고 맑은 물만 가득 담겨 있었다. 2중, 3중으로 보관되고 있었던 사리병에 어떻게 물이 가득 들어가 있는지도 의문이지만 있어야 할 사리가 보이지 않아 모두들 의아해 했다.
그래서 우선 사리병 속에 들어 있는 물의 성분을 분석해 보기로 하고 국립문화재연구소 보존과학연구실로 보냈다. 분석결과 일반적인 지하수의 성분에 지나지 않는다는 결론을 얻었다. 그러니까 오랫동안 지하수가 스며들어 사리병을 채웠던 것이다.
이 왕흥사사리장엄구의 발견으로 사리병에 사리가 담겨 있지 않다는 사실이 처음으로 밝혀졌다. 그렇다면 본래 사리 둘을 넣었는데 신의 조화로 셋이 되었다는 기록의 내용은 무엇을 의미 하는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그것은 바로 불교가 신비롭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한 내용이라는 것이 연구자들의 대체적인 시각이다. 과연 그럴까 정말 수수께끼가 아닐 수 없다.
경기문화재연구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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