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외교전문지 포린폴리시는 최근 버락 오바마 미 행정부의 북핵 대응 방식에 대해 'ABC 정책'이라는 표현을 썼다. 미 북핵 정책의 변천사에서 우리에게 익숙해진 'ABC'는 'Anything But Clinton(클린턴을 제외하고 무엇이든)'이다. 여기엔 2001년 미 공화당의 조지 W 부시 행정부가 들어서면서 직전 빌 클린턴 민주당 행정부의 대북 정책과 단절하고 강경책으로 선회했을 당시의 변화가 압축돼 있다. 당연히 포린폴리시가 분석한 오바마 행정부에서의 'ABC'는 그 'ABC'가 아니다.'Anything But Chris(크리스를 제외하고 무엇이든)'로 바뀐 것이다.
이 크리스는 부시 행정부에서 북핵 6자회담 미 수석대표였던 크리스토퍼 힐 전 국무부 동아태 차관보를 지칭한다. 힐 전 차관보의 대북협상 방식이 퇴짜를 맞은 것은 단기적 성과에 지나치게 집착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정치적 의욕이 앞서 진전이 있는 것처럼 보이게 하는 모양새에만 치중하다 보니 협상 결과는 단명할 수밖에 없었다. 심지어 북한의 '살라미(협상의 단계를 잘게 나누어 매 단계마다 시간을 끌면서 대가를 요구하는 방식) 전술'에 역이용당하기도 했다는 점을 부인하기 어렵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과거에서 교훈을 얻었을 오바마 행정부가 현재 구사하고 있는 제재ㆍ대화 병행의 '투트랙 전략'은 구체화한 신(新) ABC정책에 해당한다. 그 연장선상에서 단기적 차원을 넘어 북핵 문제의 근원적 해결을 추구하려는 오바마 행정부의 목표의식은 '패키지 딜(포괄적 일괄타결)'구상에 담겨 있다. 물론 이전 정부와의 차이라는 것이 제재와 대화를 조합하는 비율이나 강조점의 변화에 불과하다고 할 수도 있다. 그럼에도 총론적으로 평가하면 오바마 행정부 나름대로는 이제까지 가보지 않은 길을 가겠다고 나선 것으로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나아가 스티븐 보즈워스 미 대북정책 특별대표의 방북으로 귀결된 최근 상황전개를 투트랙 전략의 성과로 꼽는 것도 그리 빗나간 일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이제까지의 대북협상 역사에 비추어 더욱 강조돼야 할 사실은 이제부터가 시작이고, 지금이 북한에 되치기를 당할 가장 위험한 때이기도 하다는 점이다. 신 ABC 정책이 바야흐로 본격적 시험에 들었다는 얘기다. 이런 시각에서 보즈워스 방북 전후를 되짚어 보면 긍정적 신호와 부정적 조짐들이 혼재해 있다. 예를 들어 미국 주도의 국제공조로 북한산 무기를 실은 화물기를 적발해 낸 것은 대화를 하되 제재는 풀지 않겠다는 단호함을 보이는 데 효과가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오바마 대통령의 대북 친서를 사전에 숨겼다거나 북한의 6자회담 복귀가 마치 사안의 본질인양 부각되는 데에는 우려가 앞선다. 비밀주의에 입각, 정보를 통제하며 능란한 말솜씨로 언론을 현혹한 것은 힐 전 차관보의 주특기였다. 도발 뒤에도 회담장 복귀 만으로 대가를 챙기게 한 것이 그의 방식이었다. 지금도 어느덧 북한은 회담 복귀가 큰 양보인 것처럼 느끼게 만드는데 성공했고 미국도 여기에 일조했다. 6자회담 복귀는 과거 출발선으로 되돌아가는 것일 뿐이다.
외교 귀재였던 헨리 키신저는 최근 워싱턴포스트에 기고한 글에서 북핵 위기 이후 15년간 달라진 것이 없다면서 "(도발과 대화복귀가 반복되는) 패턴이 바뀌지 않으면 외교는 비핵화가 아닌 북한의 핵보유를 합법화하는 수단으로 전락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실로 섬뜩한 진실이 아닐 수 없다.
고태성 국제부장 tsgo@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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