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리우드 배우 메리 픽포드(1893~1979)는 무성영화시절 세계의 연인이었다. 홀어머니를 먹여 살리기 위해 열네 살 어린 나이에 연기에 뛰어 들었고, 깜찍한 말괄량이 소녀 역할로 스크린을 휘저었다. 스물이 채 되기 전 1주일에 1편 꼴로 영화에 출연할 만큼 걸출한 스타로 거듭났다.
거칠 것 없던 픽포드의 화려한 인생도 나이가 들면서 무너지기 시작했다. 그의 얼굴에서 소녀의 흔적이 사라져갔고, 소화할 수 있는 배역이 줄어들었다. 결국 1933년 마흔의 비교적 젊은 나이에 스크린에서 종적을 감췄다. 은둔 생활에 들어간 뒤 술에 빠져들었다. 영화 속 사춘기 소녀 모습 때문에 놀림감이 될까 안절부절했고, 자신의 무성영화 판권을 사 없애기 시작했다. 1910~20년대를 가로지른 영화의 여신이었지만 그의 영화들을 쉬 만나기 힘든 이유다.
살다 보면 지우고 싶은 기억들이 여럿이다. 궁전 같은 대저택에 살며 한때 할리우드의 왕족이라 불렸던 픽포드라고 별수 있었을까.
올해 충무로는 '해운대'라는 1,000만 영화를 다시 만났고 '국가대표'라는 대형 흥행작을 내놓았다. 각종 영화제에서도 반가운 소식이 잇따랐다. 잊고 싶은 아픔보다 마음에 담아두고 싶은 기쁨이 클 만도 한데 세밑 충무로의 분위기는 냉골이다. '카드깡'으로 직원들에게 돈을 쥐어주는 영화사도 있고, 이런저런 사정으로 아예 돈을 받지 못해 속 끓이는 영화인도 한둘이 아니라고 한다. 흥행작을 내놓은 한 영화사는 오랜 빚에 짓눌려 최근 구조조정을 단행했다는 우울한 소식도 들린다. 1년 내내 발바닥에 불이 나게 달렸음에도 어두침침한 터널을 맴돌고 있다는 낭패감이 연말을 더더욱 시리게 하고 2009년을 더욱 잊고 싶게 할 듯 하다.
최근 충무로에 한 영화사가 새로 간판을 달았다. 이름은 '거미'. '미술관 옆 동물원'과 '거북이 달린다'에 참여한 이미영 프로듀서가 대표로 나섰다. 영화사 이름은 이 대표와 인연이 깊은 앞의 두 영화 제목 첫 자를 각각 땄다. '미술관 옆 동물원'에 출연한 연이 있는, 은퇴한 배우 심은하와 머리를 맞대 지은 이름이라고 한다. 이 대표와 오래도록 일한 이춘연 씨네2000 대표는 지난주 여성영화인축제에서 "이름이 거미라서 입에 거미줄 칠 일은 없을 듯하다"며 덕담을 던졌다.
올 한 해 너무나도 힘겨웠던 영화인들, 설마 산 입에 거미줄 칠 일 있을까라는 당찬 각오로 내년 새 출발을 다짐하면 어떨까. 2009년이 남긴 고통은 지우되 교훈을 잊어서는 안되겠지만.
라제기기자 wenders@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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