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통령 국민직접선거를 요구한 87년의 6ㆍ10항쟁이 있었고 그 요구를 군부가 받아드리는 6ㆍ29선언이 나왔다. 그리고 12월16일 실시된 제13대 대통령 선거에서는 노태우 민정당 후보가 김영삼 김대중 두 후보를 이겨 당선됐다.
그 때 나는 중앙대 정경대학장으로 있으면서 금융통화위원을 겸직하고 있었는데 88년 초에 대학원장으로 임명되었다. 그런지 얼마 뒤인 2월 중순 경 노태우 대통령 측근이라 할 수 있는 두 세 사람으로부터 내가 새 정부에 기용될 것 같다는 귀띔을 받았다.
그리고 며칠 뒤인 2월16일 이현재 총리 내정자로부터 내가 대통령 경제수석 비서관으로 내정되었으니 2월20일 정권인수준비위로 나오라는 공식통보를 받았다.
나는 대학에 휴직원을 내고 금융통화위원을 사임하고 얼마간 가지고 있던 주식을 팔아 국채로 대체하는 등 주변 정리를 마무리 하고 2월20일 정권인수준비위를 찾아 갔다. 인수준비위는 삼청동 금융연수원 자리였던 것으로 기억된다.
나는 이 자리에서 노태우 대통령을 처음 만났다. 이 때 청와대 진용은 홍성철 비서실장 최병렬 정무 이연택 행정 이수정 공보 한영석 민정 노창희 의전 그리고 이현우 경호실장 등이었으며 두어 달 뒤에 박철언 정책수석과 김종휘 안보보좌관이 합류하였는데 모두가 내게는 초면이었다.
2월19일에는 내각 발표가 있었는데 이현재 총리 나웅배 부총리 사공일 재무 윤근환 농림 안병화 상공 최동섭 건설 이봉서 동자 최명헌 노동 이범준 교통 오명 체신 등이었다. 청와대와 내각을 통 털어서 대통령과 일면식도 없었던 사람은 나 밖에 없는 것 같았다. 그런데 어떻게 내가 이런 직책을 맡게 되었는지 나 스스로 궁금했다.
노 대통령은 인사라인에서 올라온 복수의 명단을 들고 주변측근들의 의견을 참고 했다는 것인데 이 과정에서 경제계에서 나와 잘 알고 지내온 분들이 내게 우호적인 역할을 한 것 같다. 내가 호남 출신이라는 배려가 있었다는 말도 있었는데 경제비서실에 가보니 서기관이상 비서관 약 20명 가운데 호남출신이 한 사람도 없는 것을 보고 그럴 수도 있었겠다 싶었다.
2월25일 대통령 취임식을 마치고 비서실에 첫 출근을 했다. 대통령 비서실이라 하면 근무환경도 좋을 것으로 알았는데 막상 가서 보니 사무실은 낡고 좁고 냉난방도 제대로 안 되고 있었다.
경제수석실의 국장급 이상 비서관에는 이석채(현 KT사장) 한이헌(경제기획원 차관) 심형섭(대한보증보험 사장) 장상현(교통부 차관) 홍 철(인천대 총장) 홍성원(현대전자 부사장) 주경식(보건복지부 차관) 윤석춘(국제 안전환경 연구원장)씨 등이 있었으며, 그 후에 구본영(과기처 장관ㆍ작고) 이환균(건교부 장관) 씨가 합류하였고 이우철 과장(생명보험협회장)이 행정을 맡아 나를 도왔다.
한국은행 조사부와 대학에서만 일해 온 나에게 청와대 생활은 딴 세상이었다. 찾아오는 사람, 만나자는 사람 그리고 끊임없는 회의로 생각할 틈조차 없었다. 회의도 대통령 주재회의, 비서실장 주재회의, 경제비서실 회의, 당정회의, 경제장관회의 등 거의 정례적인 회의만도 많았다.
내가 나 스스로를 이끌어 가는 삶이 아니라 떠밀려서 사는 삶 이었다. 웬 비밀이 그렇게도 많은지 매일 다루는 일들은 밖에 말도 할 수 없었다. 권력이 없는 곳과 있는 곳은 이렇게 다른가 싶었다. 이 모두가 야생마처럼 자유분방하게 살아온 내게는 생소한 환경이었다.
나는 대학교수로서 정부의 여러 가지 정책자문 기구에 관여하면서 우리나라 경제정책이 내각이 아니라 청와대 비서실에 의해서 주도되어 온 관행은 시정되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한 관행은 권위주의적 산업화 시대의 유물이며 민주화와 선진화 그리고 민간주도 경제를 지향하는 마당에 있어서는 마땅히 고쳐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실제로 내가 청와대에 들어가 보니 정책의 책임을 지고 있는 각부 장관은 대통령을 만나 진지하게 정책을 협의 할 기회란 매우 드물었다. 공식회의나 외부행사장에서 만나는 것이 고작이었다. 더구나 대통령은 경제전문가가 아니기 때문에 대통령을 가까이서 모시는 경제수석이 하기에 따라서는 행정부를 무력화시키고 지나치게 정책에 관여할 소지가 충분히 있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경제정책에 있어서 청와대 비서실과 내각의 관계를 재검토할 필요가 있고 이에 맞춰 경제수석의 역할도 조정할 필요가 있다는 말씀을 대통령께 드렸다. 노태우 대통령은 그렇게 하라고 흔쾌히 재가 하시면서 한 걸음 더 나아가 각 부처의 의견을 항상 존중하는 자세로 일하라고 했다.
그래서 나는 한두 가지를 제외하고는 거의 모든 경제정책을 나웅배 부총리를 중심으로 한 경제팀이 결정하도록 하고 나는 대통령과 경제팀의 중간에서 보고하고 조정하고 경제팀이 잘 움직이도록 부총리에게 힘을 실어주는 일을 주로 하였다.
그래서 내가 경제정책의 전면에 나서는 일은 특수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없었으며 내각의 경제팀이 경제정책을 주도하는 틀이 굳어지게 된 것이다.
이에 대해 88년 5월1일자 조선일보는 '청와대 경제비서실이 변하고 있다'는 제하에 '경제수석 비서관실이 경제부처에 대해 시시콜콜 간섭하거나 사전보고를 요구하는 일이 없어지고 관계 장관들이 자율적으로 정책을 입안 추진하도록 하는 방향으로 경제 권력의 원상회복이 이루어지고 있다'고 보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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