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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의 고리, 사람이 사람에게] <5·끝> 노숙인 자활 돕는 '전직' 노숙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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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의 고리, 사람이 사람에게] <5·끝> 노숙인 자활 돕는 '전직' 노숙인

입력
2009.12.18 01: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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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일 오전 서울 종로구 와룡동 골목에서 중년 남성 8명이 한 출판사의 이삿짐을 나르고 있었다. 방한 외투와 작업용 목장갑을 착용한 이들은 영하 5도의 맹추위에 연신 허연 입김을 뿜으며 분주히 트럭에 짐짝을 부렸다. 크지 않은 사무실이었지만 지하에 있어 작업이 생각보다 녹록하지 않았다.

"언능언능 해야제, 뭣하냐?" 책꾸러미를 양손에 들고 성큼성큼 걷던 박영호(56ㆍ가명)씨가 한 켠에서 가쁜 숨을 몰아 쉬고 있는 김갑수(51ㆍ가명)씨의 뒤통수에 대고 퉁을 놨다. 잠시 입술을 삐죽댄 김씨는 이내 팔을 다시 걷어붙였다. 점퍼까지 벗어 던지고 분투하는 최진호(61ㆍ가명)씨에겐 "역시 형님이 젤 바쁘쇼"라는 박씨의 칭찬이 날아들었다.

노련한 솜씨로 작업을 독려하던 박씨였지만 남들이 부려놓은 짐 옆에서 뭉그적거리는 이종운(49ㆍ가명)씨에겐 슬쩍 눈길을 줬을 뿐 별말 하지 않았다. "들어온 지 한 달 조금 넘은 신참이거든. 적응할 시간을 줘야제." 걸어서 10분 거리인 새 사무실에 짐을 옮기고 정리해주는 것으로 4시간 만에 작업이 끝났다. 사장이 십장인 박씨에게 지불한 일당 24만원은 일꾼들에게 3만원씩 공평하게 돌아갔다.

이들은 단순한 일터 동료가 아니다. 함께 먹고 자는 식구다. 이들은 박씨를 '형님'이라 부르고 박씨는 상대 나이에 따라 호칭을 올리거나 낮춘다. 모두 13명인 박씨 식구들은 서울역 맞은편, 용산구 동자동 쪽방촌에 있는 낡은 다세대 주택에서 23㎡(7평) 남짓한 1층 방과 지하층 방에 세들어 산다.

아래층 방값은 노숙인 자활 지원단체인 다시서기센터에서 지원하지만, 위층 월세 40만원을 비롯한 생활비 전부는 전적으로 박씨가 책임진다. 다른 식구들은 공짜로 숙식을 해결하는 셈이다.

박씨의 '동생들'은 모두 노숙인이다. 생면부지를 10명도 넘게 식구로 맞아들이며 박씨가 요구하는 것은 단 한 가지, 반드시 일을 하라는 것이다. 노숙 생활에서 벗어나려면 잃어버린 근로의욕을 되찾아야 한다는 생각에서다.

"한번 따뜻한 방에서 잔 놈은 다시 안 나가려고 하거든. 그래서 내가 그래요. 따뜻하게 자고 싶으면 '넝마'든 '노가다'든 꼭 일을 해야 한다고." 따르지 않는 식구에겐 박씨의 닦달이 이어진다. 김갑수씨는 "평소엔 잘 해주다가 좀 느슨해진다 싶으면 불호령이 떨어진다"고 말했다.

말뿐만이 아니다. 박씨는 25만원에 손수레 4대를 구입해 밤마다 동생들과 폐지, 고철, 빈병을 주우러 다닌다. 이들의 폐품 수집은 남대문 명동 시청, 멀게는 종로 동대문 을지로를 누비며 밤 9시부터 다음날 새벽 2시까지 이어진다.

잘하면 하루 4만원쯤 벌지만, 서투른 사람은 3,000원 버는 게 고작인 일이라 박씨는 작업 중 폐품 많은 곳, 돈 되는 폐품 등을 꼼꼼히 일러준다. 박씨는 "폐품 판 돈을 나눠줄 땐 자기가 얼마나 노력했는지 확인하라는 뜻에서 영수증을 함께 준다"고 말했다. 이삿짐 운반 같은 일거리도 부지런히 찾은 덕에 요즘은 먼저 연락이 오기도 한다.

길어야 1년 정도 머물 뿐인 뜨내기 식구들이지만 박씨가 쏟는 애정은 각별하다. 몰래 술을 마시거나 서로 다툴까 봐 밤중에도 수시로 일어나 방을 둘러본다. 무엇보다 밥 먹이는 일에 열성이다.

식사시간만 되면 박씨 집엔 한때 이곳에 살았던 노숙인 20여 명까지 몰려든다. 그렇다 보니 일주일이면 쌀 20㎏짜리 한 포대, 라면 3박스가 동이 난다. 식량 후원이 가끔 있다지만 월 100만원 조금 넘는 박씨 수입으론 벅찬 상황이다. 하지만 그는 개의치 않는 표정이다. "밥 때 되면 와서 '형님 밥 좀 없소' 하는데 어쩌겄소. 그러다 보니 상이 점점 커진 거제…."

박씨가 노숙자들의 '형님'이 된 것은 2006년. 폐품을 팔아 번 돈으로 동자동에 월셋방을 마련한 그에게 다시서기센터 이형운 팀장이 제안했다. 방 한 칸을 더 얻어 서울역 인근 노숙인들과 같이 살며 폐품 수집을 가르쳐보는 게 어떻겠냐는 것이었다.

박씨는 흔쾌히 그러겠다고 했다. 그 역시 2003년 가정 문제로 가출한 뒤 서울역과 영등포역 주변을 전전하다가 이형운 팀장을 만나며 재기한 터였다. "내가 그 전에 3년간 노숙 생활을 해봤응께 그 사람들이 뭐가 힘든지 잘 알제."

여간해선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노숙인들이지만 '형님'의 헌신엔 조금씩 마음의 문을 열어가는 눈치다. 이종운씨는 "한번 앉으면 소주 5, 6병씩 마시곤 했는데 형님과 살면서 주량이 1병도 안되게 줄었다"고 말했다.

최진호씨는 박씨에 대한 생각을 묻자 아무 말 없이 엄지손가락을 올렸다. 이형운 팀장은 "무기력하던 노숙인들이 비록 담뱃값 수준일지라도 스스로 돈을 벌었다는 사실에 감동하는 것 같다. 조금씩 자존감을 회복해가는 기미도 보인다"고 말했다.

요즘 박씨 식구들은 폐품 수집을 끝뺐玆?집에 돌아가지 않는다. 대신 새벽 3시부터 6시까지 서울역 등지에서 뜨거운 물을 플라스틱 병에 담아 노숙인들에게 전달하는 '물병 자원봉사'에 나선다.

박씨는 "경험해보니 노숙을 하더라도 따뜻한 걸 끌어안고 있으면 얼어 죽지는 않겠다 싶어서 기온이 영하로 내려가는 날에는 물병을 나눠주러 다닌다"고 말했다. 영하 9도까지 기온이 떨어진 17일 새벽에도 박씨와 동생들은 뜨거운 물병 70개를 끼고 노숙인들에게 따뜻한 온기를 전하러 서울역으로 향했다.

강희경기자 kbstar@hk.co.kr

김혜영기자 shine@hk.co.kr

■ 길거리 노숙은 느는데… 실태 파악조차 허술

보건복지부에 따르면 10월 말 현재 전국 노숙인 수는 4,544명. 이중 70%인 3,280명이 노숙인 보호시설에 머물고 있고, 1,264명이 말 그대로 거리에서 잠자고 있다.

서울에서도 총 3,025명의 노숙인 중 79%(2,385명)가 쉼터 등에서 지내고 실제 노숙은 640명에 그쳤다. 그러나 최근 몇 년간 추이를 보면, 시설 입소자는 감소 추세인 반면 거리 노숙인은 조금씩 늘고 있다.

더욱이 현장 전문가들은 실제 거리 노숙인 수가 이보다 훨씬 많다고 주장한다. 사실상 노숙 상태인 사람들에 대한 실태 파악이 제대로 되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남기철 동덕여대 사회복지학과 교수는 "쪽방, 고시원, PC방, 찜찔방 등과 서울역 등을 오가며 주거지를 안정적으로 확보하지 못한 잠재 노숙인도 노숙인으로 봐야 한다"고 말했다.

노숙인 실태 파악이 허술하다 보니 정부의 대책 또한 거리 노숙인을 쉼터로 유도하는 것 외에는 특별한 것이 없다. 현재 정부의 노숙인 보호사업은 쉼터 운영과 의료 지원이 거의 전부다. 하지만 노숙인들을 쉼터로 몰아넣는 것이 해결책이 될 수 없다는 게 전문가들 지적이다.

이형운 노숙인 다시서기상담지원센터 현장지원팀장은 "노숙인 쉼터 등은 시설이 열악할 뿐 아니라 이들이 모여 생활하는 것이 서로의 무력감을 키운다는 분석도 있다"며 "개인 성향을 판단해 의지할 대상을 만들어주고 일할 수 있는 기회를 주는 게 더 현실적이다"고 말했다.

또 쉼터 등 시설이 도심에서 멀리 떨어진 것도 문제다. 일 하려는 의지가 있는 노숙인들은 일용노동시장이 형성된 서울역 등 도심 주변에 머물려고 하기 때문이다.

남 교수는 "노숙인의 실태와 욕구를 제대로 파악해 주거복지를 개선하는 한편, 주거가 불안정한 잠재적 노숙인에 대한 지원책 마련 등 근본적 해결 노력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김혜영기자 shin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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