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직업적 임무는 미래의 의사들에게 역사, 철학, 윤리와 같은 인문학을 가르치는 일이다. 이 일을 처음 시작한 10년 전에는 과학적 세계관으로 무장한 의학도들에게 인문학처럼 구름 잡는 이야기를 가르쳐서 무엇 하겠느냐는 비아냥거림도 많았다. 이제는 여러 의과대학이 인문학 전담교수를 채용하고 인성교육을 강조하는 등 점차 그 중요성을 인식하고 있다.
의학과 인문학의 만남
그러나 아직도 왜 의사들이 인문학을 배워야 하는지 논란이 있는 것이 사실이다. 의술이란 사람의 몸에서 발견된 생물학적 법칙과 사실을 병든 몸에 적용해 정상 상태로 되돌리는 것이라는 생각이 지배적이기 때문이다.
의사와 의학이 기준이고 환자와 질병은 대상인데 인문학은 자꾸 그 대상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려고 하니 불편할 수밖에 없다. 과학인 의학을 인문학의 시선으로 바라볼 수 있다는 사실 자체는 신기하고 재미있지만, 그렇게 자신들을 다른 시선에 노출시키기는 꺼림칙한 것이다. 나는 그렇게 신기하지만 불편한 존재가 되어갔다.
의학에 인간적 가치와 의미를 불어넣어야 한다는 신념에는 변함이 없었지만 과학적 의학의 거대한 흐름을 바꿀 수는 없었다. 변화의 작은 단초를 만드는 데 만족해야만 했고 그러기 위해서는 미래의 주인공인 학생들을 잘 교육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의학의 역사를 알면 그 흐름의 방향을 가늠해 미래를 바라보는 통찰을 얻을 수 있을 것이고, 문학 작품을 읽으면 감동을 일으켜 따뜻한 의사가 될 수 있으며, 철학을 공부하면 이 모든 것을 통합해 자신의 세계관을 정립할 수 있을 것이라 믿었다.
하지만 이러한 전망은 지식이 전달되면 변화는 저절로 온다는 식의 안이한 사고방식에서 온 것이었다. 나는 무의식적으로, 의학 자신이 심각한 질병을 앓고 있으며 인문학이야말로 치료제라고 굳게 믿고 있었다. 역설적이게도 나의 인문학은 자신이 병들었다고 진단한, 그래서 치료하겠다고 나선 의학의 관점에서 세상을 보고 있었던 것이다. 인문학은 지나친 과학화로 인해 사람의 향기를 잃어버린 의학을 다시 인간화하기 위한 수단이라 믿었는데 바로 여기에 문제가 있었다.
이 구도에 따르면 의학은 병든 몸을 치료하고 인문학은 병든 의학과 사람을 치료한다. 인문학이 최고의 의사인 셈이다. 마치 사회생물학자들이 동물세계에서 발견한 생물학적 사실로부터 인간 세상의 모든 문제를 풀어야 한다고 주장하듯이 나는 인문학이 모든 문제의 최종 해결책이라고 믿었다.
확신이 있었던 만큼 열의도 대단했지만 강의실 분위기는 냉랭했다. 확신에 찬 신자가 반신반의하는 불신자를 설득하듯 나는 인문학이라는 재미없는 지적 상품을 판매하고 있었던 것이다. 의학에서의 인문학이란 현학적 지식의 발굴과 전수가 아니라 환자와 의사, 교수와 학생이 현장에서 만들어내는 새로움과 거기서 솟아오르는 삶의 의미와 가치에서 출발한다는 깨달음을 얻은 것은 이 일을 시작하고도 10년 가까이 지난 시점에서였다.
소통과 포용으로 치유
새로움을 만들기 위해서는 변해야 했는데, 문제는 '누가'와 '어떻게'였다. 지금까지는 의사와 교수가 변화의 방향을 결정하고 환자와 학생은 따르기만 했지만 이제는 사정이 달라졌다. 의료인과 교육자는 변하지 않은 채 환자와 피교육자만 변하기를 바라는 자세는 사람 사이에 일어나는 사태를 다루는 인문의 근본과 어긋나는 것이었다. 상대방을 한 움큼이라도 내 속에 담지 않고서는 진정한 소통이 이루어질 수 없고 치유와 교육 또한 이룰 수 없는 것이었다.
이제는 강의실 분위기가 많이 따뜻해졌다. 학생들이 아닌 나 자신이 달라졌기 때문이다. 그들을 내 속에 담고 그들도 나를 조금씩 자신들 속에 담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의사와 교사와 정치인은 모두 환자와 학생과 국민을 자신들 속에 조금씩 담아야만 하는 사람들이다. 너를 담은 나는 아름답다.
강신익 인제대 의대 교수·인문의학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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