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위헌 결정이 난 혼인빙자간음죄 헌법소원을 대리한 황병일(59) 변호사는 "이강국 헌재 소장이 위헌 결정문을 읽던 순간을 잊지 못한다"고 했다. 국선 변호인인 그가 사회적으로 엄청난 파장을 일으킨 위헌 결정을 이끌어내기까지 그의 노력은 예상을 뛰어넘는 것이었다.
"국내외 관련 논문 수십편을 파고들어 위헌 논리를 개발했어요. 그 과정에서 우리나라를 제외하면 쿠바, 터키 등 극소수 국가에만 남아 있는 악법임을 알게 됐고, 위헌 결정을 받아낼 수 있으리라는 확신이 생겼죠."
그의 예상대로 노력은 헛되지 않았다. 1988년 헌재 출범 후 형법의 형벌조항(각칙)에 대한 첫 위헌 결정이 내려졌다.
헌재에서 국선 변호인의 활약이 눈부시다. 황 변호사뿐 아니다. 지난 6월 김정진(38) 변호사는 판결 선고 전 구금 일수를 형기에 전부 혹은 일부 산입할지를 법관 재량에 맡긴 형법 조항에 대해 위헌 결정을 받아냈다.
그 동안 법원은 상소 남발을 막으려고 선고 때 실제 구금 일수에서 10일 가량 뺀 기간 만 형기에 반영했다. 그러다 보니 실제 형량보다 더 오래 징역을 사는 불법이 사법부에서 일어났다.
김 변호사는 "그렇지만 많은 사람들이 법원에 밉보일까 봐 아무 말 하지 못해왔다"며 "사법 사각지대에 방치된 기본권을 회복하는 결정을 이끌어 내 보람이 컸다"고 했다. 이 사건은 형법 총칙에서 헌법불합치 등 변형 선고가 아니라 곧바로 위헌 선고가 내려진 첫 사례였다.
역시 국선 변호인인 문한식(61) 변호사는 올 2월에 교통사고특례법 상 종합보험가입자의 처벌면제 조항에 대한 헌법소원에서 위헌 결정을 이끌었다. 운전자가 종합보험에만 가입하면 피해자가 중상해를 입어도 형사처벌을 면제해 주던 이 조항에 대한 위헌 결정은 사회적으로 큰 파문을 불러왔다.
문 변호사는 "남에게 큰 후유 장애를 남기고도 사과 한마디 없이 돈으로 해결하면 된다는 풍조를 고치려고 이 사건을 맡았다"고 말했다.
헌재 국선 변호사는 법조계에서 '진짜 법조인'으로 통한다. 수임료가 건당 56만~58만원에 불과해 돈과는 거리가 먼 데다, 자료수집과 법 논리 개발에 많은 노력과 시간이 들어가는 탓이다. 그래서 법원처럼 전담이 아니라, 일반 변호사 가운데 지원자 위주로 인력 풀을 구성해 운영된다.
돈이 되는 일도 아닌데 왜 이처럼 힘든 일을 할까. 황 변호사는 "법령의 잘못을 지적해 위헌 결정을 받아내는 일은 법률가라면 누구나 한번 꿈꾸는 일"이라고 했다. 문 변호사는 "헌재 국선은 비록 힘들고 보수도 박하지만, 사람답게 살 권리에 걸림돌이 되는 불합리한 제도를 바로잡을 수 있다는 매력이 있다"고 말했다.
헌재는 이들 세 변호사를 '올해의 모범 국선 대리인'으로 선정해 14일 표창한다.
이영창 기자 anti092@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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