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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의 고리, 사람이 사람에게] <1> 화가 선생님이 시인 제자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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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의 고리, 사람이 사람에게] <1> 화가 선생님이 시인 제자에게

입력
2009.12.14 00: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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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병마가 사랑을 이길 순 없죠"

독감으로 간밤에 열이 38도까지 올라 한숨도 못 잤지만, 이동남(19)군은 인향봉(42)씨가 진행하는 미술치료 수업에 빠질 수 없었다. 희귀난치병으로 근육이 허물어지고 있는 몸을 왼팔로 버티며 기어이 탁자 앞에 앉았다.

호흡기 근육이 약해져 기침도 제대로 못하는 동남이를 인씨가 안쓰럽게 바라봤다. 평소 같으면 가벼운 농담을 건네며 시작했을 수업이련만, 인씨는 애써 밝은 표정을 지었다. "자, 오늘은 점토로 크리스마스 트리 장식을 만들어봅시다!"

지난 8일 서울 마포구의 근육병 환자 공동체 '잔디네집'. 화가인 인씨가 매주 화요일마다 환자들의 근력을 길러주기 위해 무료로 봉사하는 미술치료 시간이었다. 이곳에서 3년째 만난 이군과 인씨, 이들 사이에는 그러니까 사람들간에 끊임없이 이어지는 희망의 숨결이 담겨 있다. '사람이 사람에게' 전하는 희망의 고리다.

어린 시절 7년간 골수염을 앓다 기적적으로 호전된 인씨는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나눔의 삶을 실천했고, 그의 도움으로 이군은 삶의 끄트머리에서 다른 이들에게 희망을 전하는 '시(詩)'를 쓰게 됐다. 지난달 21일 서울 신촌에서 열린 '잔디네집 후원 일일 호프'행사에선 화가 선생님이 찍은 풍경 사진을 배경으로 시인 제자가 쓴 시가 전시되는 조촐한 시화전도 열렸다.

동남이는 단백질 공급 이상으로 근육이 약화되는 희귀난치병, 근육디스트로피 중증 환자다. 6년 전 대전의 고아원에서 이곳으로 옮겨진 동남이는 꾸준한 재활 치료를 받고 있지만 병세는 계속 나빠졌다. 3년 전부터는 아예 누워 지내는 처지인데 근육이 빈약해 뼈가 배기다 보니 봉사자들이 2, 3시간마다 자세를 바꿔줘야 한다.

2006년부터 잔디네집을 찾은 인씨가 그런 동남이를 처음 봤을 때 "골수염으로 투병했던 내 어린 시절이 절로 떠올랐다"고 한다. 한창 뛰놀 아홉 살 때 다리뼈가 곪아 고름이 나오는 증세가 시작돼 이후 7년간 혼자 힘으론 거의 움직이지 못했던 인씨였다. 당시 의사들도 정확한 병명을 몰라 딱히 치료책을 찾지 못했으나 중학교 3학년 때부터 기적처럼 호전됐다.

인씨에겐 그 경험이 삶을 다시 보게 하는 힘이 됐다. 결혼과 임신으로 다니던 직장을 그만뒀지만, 2000년 서른 셋의 나이로 뒤늦게 그림 공부를 시작해 늦깎이 화가의 꿈을 이뤘고 나눔의 삶에도 눈을 돌렸다. 점토공예, 종이 접기 등 미술치료 기법을 배워 장애아, 치매노인 등을 위한 봉사에 나선 것이다. 인씨는 "죽을 만큼 아프고 나니 그제서야 삶이 얼마나 소중한지 알게 됐다. 동남이에게도 그걸 꼭 깨닫게 해 주고 싶었다"고 말했다.

동남이도 인씨의 수업을 들으며 점점 달라졌다. 낯선 사람을 보면 움츠러들기만 하던 동남이가 웃음이 늘고 말도 제법 많아졌다. 인씨는 "처음엔 여자 뺨치게 하얗고 가는 동남이 손 모양에, 다음엔 야무진 손재주에 감탄했다"며 "갈수록 작품에 공을 들이고 '제 것'이란 애착을 보였는데, 성취감과 자신감을 갖게 됐다는 증거"라고 말했다.

동남이가 시를 쓰기 시작한 것도 이 무렵이다. 바깥 출입이 어려워지면서 창밖을 보며 멍하니 생각에 잠기던 습관 대신 속마음을 남들에게 글로 보여 주고 싶다는 욕구를 느낀 것이다. 수줍음 많은 동남이지만 선생님에게만큼은 제 글을 보여 줬고, 인씨는 때론 날카로운 지적을 아끼지 않았다.

자원봉사 누나들에게도 감사의 마음을 담은 시를 선물하는 등 시를 통해 마음을 연 동남이는 이제 "시는 내 친구이자 생활"이라고 말한다. '내 시집을 가진 어엿한 시인이 되고 싶다'는 꿈도 이뤘다. 잔디네집을 후원해 온 시인 류시화씨의 도움을 받아 지난 9월 작품 115편을 담은 시집 '해마다 크는 집'을 출간한 것. 손아귀 힘이 떨어져 펜 대신 컴퓨터 키보드로 창작해 왔지만, 인씨에겐 힘들여 서명한 시집을 선물했다.

이날 수업 도중 기력이 달려 잠시 바닥에 드러누웠던 동남이가 다시 일어나 점토를 빚었다. 손가락만한 산타클로스의 몸통을 인씨가 잡아 주자 거기에 머리와 팔다리를 붙였고 흰색 목도리까지 둘러줬다. "이목구비가 뚜렷한 게 꼭 널 닮았다"는 인씨의 말에 동남이가 이날 처음 웃었다. 이를 놓칠세라 인씨가 "마주할 땐 무뚝뚝하면서 수업 전날마다 '내일 오시냐'고 확인 전화를 거는 건 뭐냐"며 짓궂게 놀리자 동남이가 쑥스러운 듯 고개를 돌렸다.

마침, 창밖에 올해 두 번째로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기적을 부를 것만 같은 하얀 눈과, 그걸 바라보는 동남이의 맑은 눈을 번갈아 보던 인씨가 말했다. "동남이는 제게 희망을 줘요. 배우는 사람은 바로 접니다." 희망의 고리는 다시 돌고 돌아, 봉사자와 수혜자의 위치는 또 서로 바뀌고 있었다.

이훈성기자

김현수기자

■ "월 30만원 간병비 지원으로 버티기엔…"

인구수 대비 환자수 비율(유병률)이 2만명 이하인 경우를 이르는 희귀난치병은 전세계적으로 5,000종 이상이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국내에서는 보건복지가족부 보험급여과에서 138종을 희귀난치성 질환으로 지정하고 있는데, 현재 30여 만명이 환자로 등록해 있다.

정부는 저소득 계층의 희귀난치 환자에 대해 2001년부터 진료비 전액을 무료로 지원해왔고, 지체ㆍ뇌병변 장애 1급에 해당하는 5개 질병에 한해 월 30만원의 간병비를 지원해오고 있다. 정부는 또 올해 7월부터 그 외의 상위 계층 환자에 대해 희귀난치성 환자 등록시 진료비의 본인부담금 비율을 종전 20%에서 10%로 낮춰주는 제도를 시행하고 있다.

하지만 이 같은 의료비 지원 정책만으로는 부족하다는 것이 희귀난치병 환자들의 하소연이다. 근육디스트로피 환우보호자회 김소점(37) 회장은 "희귀 난치병의 경우 진료비는 치료 비용의 극히 일부분에 불과하고, 실제로는 초음파나 호흡기 등을 이용한 각종 검사 부담이 훨씬 크지만 이에 대한 지원은 전혀 없어 환자 가족들이 힘들어하고 있다"고 말했다.

희귀병에 대한 정보 인프라도 부족한 실정이다. 지난해 경상대 박기수 예방의학과 교수의 조사에 따르면, 희귀병 환자 531명 중 정부의 의료비 지원사업을 알고 있는 사람은 438명(82.5%)이었으나, 이를 알게 된 경로로 '환우모임을 통해서'라고 꼽은 답변이 311명(61.5%)이나 됐다. 한국 루게릭병협회 박한규(49)부회장은 "협회 회원들은 환우 모임이 아니면 난치병 정보나 정부 지원 내용조차 잘 모르는데, 모임에 나오기 전에는 월30만원의 간병비를 지원받을 수 있는 제도가 있다는 것도 모르는 경우가 태반"이라며 "환우회나 인터넷 카페를 통해서 신약 정보 등을 교환하는 데도 한계가 있다"고 말했다.

김현수기자 ddacku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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