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대중 전 대통령(DJ)은 7월14일 서울 하얏트 호텔에서 주한 유럽연합(EU) 상공회의소 초청 연설을 할 예정이었다. 그러나 전 날 중환자실에 입원하는 바람에 연설은 이뤄지지 못했다. DJ는 그 병상에서 끝내 일어나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연설문의 제목은 '9ㆍ19로 돌아가자'였다. "오늘의 북핵 문제 해결방안은 북한은 핵을 완전히 포기하고, 미국은 관계 정상화를 통해 북한을 국제사회의 일원으로 받아들이는 길 뿐, 그 외 대안이 없다. 우리는 이미 이러한 원칙에 합의한 바 있다. 2005년 9월19일자 6자회담의 공동성명을 준수하면 된다"는 게 요지다.
평양 방문을 마치고 돌아온 스티븐 보즈워스 미국 대북정책 특별대표는 강석주 외무성 제1부상, 김계관 부상 등과 만나 "6자 프로세스 재개 필요성과 9ㆍ19공동성명 이행의 중요성에 대해 공통의 이해에 도달했다"고 밝혔다. 북한 외무성대변인도 조선중앙통신 기자 질문에 답하는 형식을 빌려 "6자회담 재개 필요성과 9ㆍ19 공동성명 이행의 중요성과 관련해 일련의 공동인식이 이룩됐다"고 말했다. 양측 발표에 사용된 단어가 거의 같아 발표내용을 사전 조율했다는 인상이 짙다.
DJ의 '관계 정상화ㆍ비핵화'론
6자회담에 절대 안 돌아겠다, 9ㆍ19공동성명은 무효화됐다고 선언했던 북한이고 보면 큰 변화다. 북미 양측이 적어도 6자회담과 9ㆍ19공동성명을 되살려야 한다는 데는 공감대를 형성한 것 같다. DJ의 유고연설문 '9ㆍ19로 돌아가자'를 새삼 떠올린 것은 이 때문이다.
이 연설문에 주목할 내용이 더 있다. "미국은 관계 정상화를 통한 비핵화라는 근본적이고도 포괄적인 접근방법으로 전환할 때가 되었다. 평화협정, 외교관계 수립, 경제협력 등 근본적인 문제 해결과 함께 핵 폐기를 실현하는 일괄타결방식으로 한반도에도 변화의 바람을 불러일으켜야 한다"는 대목이다.
물론 DJ의 일괄타결론은 이명박 대통령의 '그랜드 바겐'과는 결이 다르다. 이 대통령의 그랜드 바겐은 핵폐기를 전제로 하지만 DJ의 일괄타결은 핵 폐기에 선행 또는 병행하는 평화협정과 관계 정상화를 상정한다. DJ는 '비핵화를 통한 점진적 관계개선'이라는 기존 6자회담의 단계별 접근방식으로는 북한의 핵무장을 막을 수 없다고 보고 '관계 정상화를 통한 비핵화'를 주장했다.
오바마 행정부 들어 처음 이뤄진 이번 북미 양자대화의 핵심 쟁점은 바로 이 문제였다. 북한은 6자회담 복귀의 전제로 평화협정과 북미관계 정상화를 들고나왔다. 미국의 적대시 정책이 핵무기 개발의 출발점인 만큼 평화협정과 관계 정상화가 먼저 이뤄져야 6자회담 재개에 응할 수 있다는 논리다. 보즈워스 특별대표는 귀환 기자회견에서 "9ㆍ19 공동성명에는 비핵화뿐만 아니라 평화체제, 관계 정상화, 경제적 지원 등이 다 포함돼 있으며 이 모든 요소의 완전 이행에 대한 의지를 확인해줬다"고 밝혔다. 6자회담 틀에서 비핵화 논의에 추진력이 생기면 평화체제와 관계 정상화 문제를 논의할 준비가 돼 있다고도 했다.
북한 요구대로 평화협정과 관계 정상화가 먼저 이뤄지기는 어렵다. 그러나 보즈워스 방북결과로 분명해진 것은 6자회담 주요 프로세스에서 부차적으로 다뤄졌던 한반도 평화체제 구축 문제가 6자회담의 중심 의제로 부상한 점이다. 6자회담 재개와 핵 폐기 논의를 진전시키려면 이 문제를 보다 비중 있게 다루지 않을 없게 되었다는 뜻이다.
평화체제가 북핵 폐기 앞당겨
미국 내에서도 국제사회의 대북압박과는 별도로 평화체제 논의를 진행함으로써 북한의 비핵화를 뒷받침할 수 있다는 견해가 나오고 있다. 민간연구기관인 '외교정책분석연구소(IFPA)의 제임스 쇼프 아태담당 부소장의 '북한 비핵화를 뒷받침하는 평화체제'라는 글이 대표적이다.
보즈워스 특별대표나 힐러리 클린턴 국무장관 등의 최근 언행으로 미뤄 오바마 행정부의 방향도 여기서 멀지 않아 보인다. 문제는 우리 정부다. 선 핵폐기를 고수할지, '평화협정과 관계정상화를 통한 비핵화'를 진지하게 검토할지 선택의 기로에 섰다.
이계성 논설위원ㆍ한반도평화연구소장 wkslee@hk.co.kr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