빙판에 들어서기 전까지 정승환(24)씨의 발걸음은 느릿느릿 엉거주춤했다. 오른 다리에 찬 의족 탓이었다. 빙상장 입구 한 켠에서 의족을 벗은 그는 하나뿐인 다리를 썰매에 꽁꽁 동여맸다.
정씨는 깊게 숨을 들이켰다. 이제 썰매가 뒤집어지면 함께 고꾸라질 수밖에 없다. 썰매와 한 몸이 된 것이다. 그는 썰매와 다리를 묶는 끈을 더욱 단단히 당겼다. 썰매와 운명을 같이 하겠다는 결연한 각오라도 하듯이.
빙판에 올라서자 그의 모습은 확연히 달라졌다. 양손에 쥔 두 스틱으로 얼음을 지치며 바람처럼 빙판을 갈랐다. 거친 숨을 내뿜을 때마다 그의 우람한 어깨가 꿈틀거렸다. 스틱을 힘차게 휘두르면 퍽(puck)은 시속 100km 속도로 날아갔다. 정씨는 아이스슬레지(ice sledge)하키 국가대표다.
지난 3일 저녁 강원 춘천시 의암빙상장에 아이슬레지하키 국가대표 15명이 모였다. 지난달 스웨덴 말모에서 열린 '2010 밴쿠버 동계 장애인올림픽 아이스슬레지하키' 최종 예선전에서 조 2위를 거둬 본선 티켓을 딴 뒤 가지는 첫 훈련이었다.
이 종목의 본선 진출은 이번이 처음이다. 국내 팀이라고 해봐야 클럽팀 2개와 실업팀 1개뿐이고 선수도 40명밖에 없는 상황에서 거둔 값진 성과였다. 주장 한민수(38)씨는 "지난달 12일 독일전에서 승리해 본선행 티켓을 확정했을 때 경기장에 올라가는 태극기를 보면서 선수들 모두가 얼싸안고 울었다"고 말했다.
아이스슬레지하키는 하반신이 마비되거나 아예 없는 장애인들을 위해 1960년대 스웨덴에서 고안된 경기로, 썰매에 앉아서 하는 아이스하키다. 스틱은 양 손에 쥘 수 있도록 두 개를 사용하며 경기는 15분씩 3쿼터로 진행된다.
30분 가량 체조로 몸을 푼 선수들이 6 대 6으로 나눠 연습 경기를 시작하자 빙상장은 금새 얼음이 썰매 날에 갈리는 "그그극" 소리로 가득찼다.
선수들은 스틱으로 빙판을 찍어 썰매 전체를 180도 돌려 세우는가 하면, 보디체크(body check)로 상대를 힘차게 펜스로 몰아부쳤다. 60~70㎏의 선수들이 가속도가 붙은 상태에서 맞부딪히자 썰매와 함께 공중으로 붕 떠 나가떨어지기도 했다.
아이스하키의 거친 야성을 뿜어내는 순간이었다. 시속 100㎞를 넘나드는 퍽의 움직임은 눈으로 좇기도 힘들었다. 정승환씨는 "내 몸무게 50㎏에다 썰매 무게 10㎏를 합치면 60㎏인데, 속도까지 붙은 상태에서 부딪히면 웬만한 체력이 아니고선 버티기가 쉽지 않다"며 "장애인 경기 중 가장 격렬할 것"이라고 말했다.
국가대표 선수 중 최고령자인 사성근(41)씨도 20~30대 젊은 선수들과 어깨를 부딪히며 거친 숨을 토해내고 있었다. 사씨는 태어난 지 9개월 만에 소아암을 앓아 두 다리를 전혀 쓰지 못한다. 금은세공을 하던 그는 2002년 아이스슬레지하키팀을 주인공으로 한 TV 프로그램을 보고는 눈이 번쩍 뜨였다고 한다.
"피가 거꾸로 흐르면서 무언가를 꼭 해야겠다는 생각이 든 건 그때가 처음이었어요." 곧 세공 일을 그만 두고 대부분의 시간을 하키에 몰두했다. 그는 "서른 살이 넘은 나이에 시작하려니 처음에는 썰매에 제대로 앉아있지도 못했다"며 "하지만 결코 포기할 수 없었다"고 말했다.
팀에서 포워드를 맡고 있는 김대중(38)씨는 허리 아래로 두 다리가 아예 없다. 스물 두 살이었던 1992년 어느 날 집으로 차를 몰고 오다 5톤 트럭과 정면 충돌한 사고 탓이었다.
김씨는 "당시 홀로된 아버님을 모시며 생계를 책임지고 있었는데, 사고를 당했을 때는 세상이 끝난 것만 같았다"며 "달리는 차에 뛰어들거나 계단에서 굴러 떨어지고 싶은 마음이 불쑥불쑥 들었다"고 말했다.
삶과 죽음의 경계에 섰던 이들에게 이번 동계 장애인올림픽 본선 진출의 의미는 각별하다. 사씨는 "본선 티켓을 확정 짓는 경기종료 벨이 울리는 순간 그 자리에서 펑펑 울었다"며 "지난 세월 동안 이를 악물고 도전해왔던 내 자신이 너무 자랑스러웠다"고 말했다.
국내에 아이스슬레지하키의 씨앗을 뿌린 이는 2001년 타계한 고 이성근 감독이다. 연세대 아이스하키 선수였던 그는 1990년대 초 경기 도중 사고를 당해 하반신 마비가 됐다. 선수생활은 끝이었지만, 그는 일본에서 장애인 아이스하키를 본 뒤 2000년 11월 국내에서 처음 아이스슬레지하키 클럽팀을 만들어 하키의 꿈을 이었다.
한민수씨는 "원래 장애인 역도를 하고 있었는데, 어느 날 이 감독님이 찾아 오시더니 운동 같이 해보겠냐고 권유해 참여하게 됐다"며 "이 감독님은 우리를 낳은 아버지신데, 조만간 벽제 장지로 인사를 드리러 갈 계획"이라고 말했다. 아이스슬레지하키 선수들은 매년 이성근 배 대회를 열며 이 감독의 뜻을 기리고 있다.
내년 3월 열리는 밴쿠버 동계 장애인올림픽 아이스슬레지하키 본선에는 8개국이 참여한다. 한국은 미국, 일본, 셍悶?함께 A조에 속해 있는데, 첫 상대는 미국이다. "우리 목표는 당연히 금메달이죠." 하진헌 코치는 "오랜 세월 동안 함께 해온 덕분에 선수들간 팀워크는 어느 팀과 비교해도 뒤지지 않는다"며 스틱을 힘껏 쥐었다.
김현우 기자 777hyunwoo@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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