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년 전 가을, 아내의 다그침에 목이 바짝바짝 말라 들어갔다.
포도 값이 떨어질 거라는 판단에 당시 국내에서는 전혀 생소했던 블루베리를 대체작물로 택했던 터. 예상과 달리 포도 값은 천정부지로 뛰었고, 블루베리는 당장 아무런 수확도 없었다.
지금, 그의 직함 중 하나는 한국블루베리협회 부회장. 블루베리는 "없어서 못 파는" 효자 상품이 됐다. 다소 무모한 듯했던 도전이 가져다 준 결실이었다. 모리산골포도농원 이원희(66)씨. 결코 적지 않은 나이에 그는 다시 새로운 도전을 준비하고 있었다.
어머니의 고향, 희망의 터전이 되다
전쟁통에 아버지를 잃고 이 곳, 충북 영동군 학산면 모리마을을 찾았다. 어머니의 고향이었다. 그 때가 열 살 남짓. 말이 고향이었지 가진 땅 한 평 없었다.
어머니의 보따리 행상만으로는 끼니를 때우기도 어려웠다. 중학교 졸업 후 농사일에 뛰어들었다. 남의 땅을 빌려 닥치는 대로 농사를 했다. 벼 농사는 물론 누에, 담배, 잡곡, 인삼까지. 그렇게 해도 늘어나는 것은 빚뿐, 도저히 헤어나기 힘든 수렁이 아닐까 싶었다.
30대 중반, 어렵사리 마련한 땅에 새롭게 시작한 포도 농사도 시행착오의 연속이었다. 사토(沙土ㆍ모래 땅)의 농사 비법을 그대로 따라서 진흙 땅에 비료를 너무 많이 줬다가 포도알이 다 익어 터진 적도 있었고, 포도가 비를 맞지 않도록 하는 비닐을 덮어 주는 비가림의 높이가 너무 낮아 여름 고온 피해를 고스란히 입기도 했다.
그래도 좌절은 없었다. 비료 양을 줄이고, 파이프를 세워 비가림 높이를 높였다. 호밀을 심어 제초제와 퇴비를 대신했다. 최근엔 호밀 대신 들묵새라는 풀을 심어봤다.
"호밀은 효과는 좋았지만 매년 씨를 뿌리고 베는 작업을 반복해야 하는 어려움이 있죠. 하지만 들묵새는 한 번 파종을 하면 스스로 쓰러져 퇴비 역할까지 하고, 또 스스로 파종까지 되더라고요." 요즘 3,500평 남짓 이씨의 포도밭에서 나오는 머루포도(MBA)는 최상품 대접을 받는다.
블루베리, 새로운 도전을 하다
2000년대 초, 정부는 포도 농가에 "포도농사를 포기하면 일정액을 지원하겠다"고 했다. 한ㆍ칠레 자유무역협정(FTA) 체결로 포도 농사가 가장 큰 타격을 입을 거라는 이유였다.
고심하던 그에게 "블루베리를 심어보는 게 어떻느냐"는 제안이 들어왔다. 당시만 해도 국내에선 이름조차 생소하던 터. 반신반의하던 중 지역농협의 주선으로 일본 블루베리 농가 시찰에 참여하게 됐다. 그곳 블루베리 농가의 수확체험행사엔 100그램에 우리 돈으로 1만원 가량하는 고가임에도 사람들이 북적댔다. "그래, 이거다"싶었다.
포도밭 일부에 블루베리 묘목을 심었다. 하필이면 그 해 포도 시세가 급등하면서, 마음 고생도 이만 저만이 아니었다. 블루베리가 탐스럽게 영근 2년 뒤, 어떻게 알았는지 갤러리아백화점 바이어가 직접 찾아왔다. "재배한 블루베리를 모두 사겠다고 하더라고요. 백화점을 통해서 입 소문도 금세 났죠."
요즘 블루베리의 평당 수익은 7만원 정도. 포도의 2~3배는 족히 된다. 이씨는 "블루베리는 일단 심기만 하면 인건비나 각종 재료비도 거의 들지 않는다"며 "새로운 도전을 한 보람이 있다"고 했다.
또 다른 꿈을 꾸다
이쯤이면 만족할만한데, 그는 태생이 그렇지 않나 보다. 그의 생각은 이미 앞으로 5년, 10년을 내다보고 있었다. "온난화가 빠르게 진행되면서 사과 재배지도 갈수록 북상하고 있잖아요. 아마도 수년 뒤에는 이곳에서 포도 재배가 쉽지 않을 수도 있겠죠."그는 다시 대체작물을 모색하는 중이라고 했다.
요즘엔 가공식품에 대한 관심도 높다. 포도즙이나 포도잼 등은 기본. 최근엔 와이너리 자격증까지 땄다. 이씨는 "농산물의 부가가치를 높여야만 농촌이 한 단계 더 도약할 수 있다"고 했다.
농한기인 요즘, 이곳 저곳 강연을 와달라는 요청이 줄을 잇는다. 그가 강연에서 꼭 빼놓지 않는 말이 있다. "세상이 바뀌고, 사람이 바뀌고, 기후가 변하는데 우리 농업인들은 그저 어렵다고만 하소연하죠. 세상의 변화 흐름에 맞게 농업인들도 변화하는 것, 그것이 어려움을 극복하는 유일한 길입니다."
글ㆍ사진 = 이영태 기자 ytle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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