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화지만한 크기의 나무상자엔 모래가 채워져 있고, 그 옆엔 사람, 동물, 식물, 자연물, 탈 것 등 10종으로 분류된 작은 모형 110개가 상자에 담겨 있었다. '아이'는 인형을 주섬주섬 꺼내 모래에 부려놓고 놀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한참 지켜보던 상담사가 말을 붙였다. "와, 다 만들었구나. 인형들이 뭘 하고 있나 이야기해볼까?" 아이는 고개를 끄덕였지만 입은 굳게 다문 채였다. 상담사는 신중하게 다시 말을 걸었다.
"얘는 왜 바위 뒤에 숨었어? 선생님한테 얘기해줄래?" "저 아저씨 때문에 못 나가는 거예요. 선생님은 몰라도 돼요." "응, 그렇구나. 그런데 아저씨는 왜 뱀 위에 서 있는 걸까?" "벌 받는 거예요. 아저씨가 얘 친구를 데려가서 만졌어요. 나는 무서워서 여기 계속 숨어 있었어요."
순간 상담사의 눈이 빛났지만 이어지는 질문은 평온했다. "그랬구나. 이 아이가 너구나." "네, 나는 계속 숨어 있었어요."
지난 5일 경북 경산시 대구대에선 '모래상자를 활용한 성피해 아동 면담'을 주제로 역할극 수업이 진행됐다. 국내 최초로 개설된 '성피해 아동 진술평가 전문가 과정'의 일환이었다.
교육생으로 참여한 사회복지사, 아동교육 상담사 등 아동보호 전문기관 관계자 38명은 상담사와 성피해 아동으로 역할을 나눠 아이가 감춰둔 기억과 상처를 놀이 과정에서 자연스레 드러내도록 하는 훈련을 받았다.
모래상자는 1939년 영국에서 개발돼 아동 심리치료에 널리 쓰이는 도구다. 아이가 모형을 선택하고 모래 위에 배치하는 양상을 통해 정서를 파악하는데, 예컨대 같은 동물 인형이라도 뱀 같은 야생동물은 욕구와 힘을 가진 대상을, 돼지 같은 가축은 친근한 가족을 표현한다고 본다.
이날 수업에 활용된 모래상자는 이경하 부산심리치료연구센터 소장이 성피해 아동 상담에 적합하도록 원형보다 크기를 줄이고 모형 종류를 단순화한 것이다.
강의를 직접 진행한 이 소장은 "인형을 '얘'라고 부르던 아이가 어느 순간 인형을 가리키며 '제가요'라고 말하며 자기 얘기를 시작한다. 그런데 이때 면담자가 과잉 반응을 보이면 아이의 말문을 닫게 할 수 있다"고 조언했다.
이번 과정은 '아동 진술평가 전문가' 양성이 목표다. 만 16세 이하나 장애인 성폭력 피해자의 진술 녹화 자료가 법적 증거로 채택될 수 있도록 한 2004년 성폭력처벌법 개정에 따라 피해자 진술 확보에 참가하고 그것의 증거 능력을 평가하는 전문 인력이 필요하다는 인식에 바탕한 것이다.
지난달 21일부터 3주간 토ㆍ일요일에 열린 이 과정에선 역할극 수업 외에도 성피해 아동의 심리적 특성, 아동 성피해 재판 과정과 문제점, 아동 성피해의 의료적 증거, 아동진술 신빙성 평가 등에 관한 법조계, 의료계 등 전문가의 강의가 이어졌다.
굿네이버스 김경희 팀장은 "국내 성폭력 피해자 중 미성년자가 35% 이상이고, 특히 13세 이하가 10% 이상을 차지한다"며 "아동 성폭력을 막을 제도적 장치와 함께 피해 아동의 사회적응을 돕는 전문가 개입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교육생 반응도 긍정적이었다. 포항에서 장애인 심리치료사로 일하는 정해진(29)씨는 "경찰에서 성폭력을 당한 장애아동 진술을 받는데 도와달라는 부탁을 여러 번 받았다"며 "그때마다 어려움을 느껴 전문적 교육을 받고 싶던 차에 마침 이 과정이 열렸다"고 말했다.
아동 심리치료사 민동옥(32ㆍ여)씨는 "판례 강의를 들으며 법원이 '아이에게 유도 질문을 했다' '답변에 일관성이 없다'는 등의 이유로 증거로 채택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는 걸 처음 알았다"며 "아동 발달 단계별로 신빙성 있는 진술을 얻기 위한 방법을 배운 것이 수확"이라고 말했다.
과정 개설을 주도한 한국아동심리재활학회 송영혜 학회장(대구대 교수), 이경하 소장, 조은경 한림대 교수는 모두 성폭력 피해 아동 연구 및 상담에서 손꼽히는 이들이다. 이들은 "'조두순 사건' 피해 아동이 경찰과 검찰에서 여섯 차례나 진술을 반복하며 고통 당한 현실을 보며 아동 피해자 조사를 수사 당국에만 맡겨둘 수 없다는 생각에 전문가 과정을 열었다"고 말했다.
아동이 수사기관과 법정에서 거듭 진술을 강요 당하며 '제2의 피해'를 입는 것을 막는다는 취지로 성폭력처벌법이 개정됐지만 아동 성폭력 수사 및 재판에서 민간 전문가의 참여는 아직 미미하다.
일부 전문가들이 경찰이 성폭력 아동 전문조사 기구로 시범 운영 중인 '원스톱 센터'에 참여하거나, 법원 의뢰로 진술 자료의 증거 능력 여부를 자문하는 정도다. 대검찰청 관계자는 "피해 아동을 조사할 때 임상심리사, 소아정신과 의사 등 전문수사 자문위원과 협의하도록 지침은 마련했지만 현장에선 잘 시행되지 않고 있는 게 사실"이라고 말했다.
송영혜 교수는 "아동심리 전문가가 피해 아동 진술 과정에 참여해 한 두 차례 면담만으로 충분한 진술을 얻어야 한다"며 "특히 놀이치료 기법을 적용하면 아이가 놀이에 몰입하며 자연스럽게 경험을 털어놓을 수 있고 심리적 치료 효과도 거둘 수 있다"고 말했다.
이경하 소장은 "미국 등에선 전문가가 피해 아동의 진술을 받는 과정을 담당 수사관과 판사가 함께 지켜보는 '증거보전제도'를 시행하는데 국내에도 법적 근거가 있는 만큼 이를 활성화해야 한다"고 말했다.
대구=김혜영기자
이훈성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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