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해에 가수 김현식의 사망 20주기를 맞는다. 그에 관한 다큐멘터리를 만들고 있는 방송사 제작팀을 만났을 때 나는 그가 세상을 떠나고 벌써 20 년이 흘렀다는 것을 알았다. 잊고 있었다. 그 20 년 동안 그는 내게 중요한 사람이 아니었다. 그 사이 나는 결혼을 했고, 아이가 고등학생이 됐으며, 미국에 살다 왔고, 몇 가지 직업을 전전했다. 열심히 살았는지는 모르겠으나 정신 없이, 분주히 산 것만은 분명하다. 이제 나는 그의 죽음을, 아니 그의 삶을 이해할만한 나이가 된 것인가?
이해 불가능한 인간
20 년 전 나는 신문사 수습기자였다. 첫 직장이 정해지고 그 직장에서 정년을 맞는 걸 당연하게 생각했다. 당연히 꿈은 없었다. 직장 상사, 동료, 후배들로부터 적당한 수준의 호감을 유지하는 게 그때 나의 최대 목표였다. 그래야 그 직장을 오래 다닐 수 있었으니까.
어느 날부터 신문에 그에 관한 연재를 시작했다. 솔직히 김현식이 누군지 잘 몰랐다. 그와의 첫 만남은 불쾌하다기보다는 이해하기 힘든 것이었다. 낮술, 안주용 삼각 김밥, 이해할 수 없는 대화들, 갑작스런 기타 연주와 노래가 기억의 전부다. 분명한 건 앞으로의 취재가 쉽지 않으리라는 예감이었다. 예감은 아주 정확했다. 핸드폰도 없던 시절에 매일 그를 찾아 이곳 저곳을 헤매며 간신히 그를 찾아내 연재를 이어갔다. 그가 노래를 부르던 나이트클럽에서도 그를 만났고, 방송국 스튜디오, 그가 입원해 있던 병원의 병실에서도 그를 만났다. 알아갈수록 그는 점점 28살의 내게는 이해 불가능한 사람이었다. 그 일을 무사히, 빨리 끝내는 것만이 나의 목표였다. 일만 끝나면 그와는 다시 볼 이유가 없었으니까. 적어도 이해는 할 수 있는 사람들끼리 사는 것이었다. 그의 건강은 점점 악화되고 있었고, 그는 여전히 자신의 몸을 돌보지 않았다.
그 몇 달 후에 그는 세상을 떠났다. "한국 록 발라드의 전설 김현식이 세상을 떠났다"로 시작되는 그의 사망기사를 쓰던 저녁의 신문사 편집국 풍경은 지금도 생생하다. 나는 저녁 반주에 조금 취해 있었고, 창 밖 광화문 도로에는 퇴근길 정체가 한창이었고, 인도에는 늦게 떨어진 플라타너스 잎들이 가로등 불빛 아래 굴러다니고 있었다.
다음날부터 수많은 여성 팬이 내게 전화를 해왔다. 그들은 전화 속에서 울부짖고, 절규하고, 혹은 아무 말이 없기도 했다. 나는 마치 그가 내게 남겨준 의무를 수행하는 사람처럼 그 모든 전화를 성실하게 받았다.
그가 떠난 뒤 몇 달 후 나는 그에 관한 조그만 책 한 권을 묶어 냈다. 그의 육성을 정리한 것과, 여러 사람들의 추억을 함께 묶어냈다. 그 책은 지금 거의 유일한 그에 관한 기록이다. 책을 만들면서 그런 생각이 들었다. 누군가 나를 그에게 보냈다. 그가 세상을 떠나기 전 그를 기록하라고. 세상 모든 일에는 다 이유가 있는 법이다.
20년 만에 이해한 삶
방송사 다큐멘터리 팀과 그가 세상을 떠난 후 처음으로 그의 집이 있던 아파트 골목을 찾았다. 그리고 그 골목에서 내가 보았던 그를 설명했다. 팔짱을 끼고 물끄러미 바라보던 나를 배웅하던 그의 모습. 그 순간 나는 그가 세상을 떠난 지 20 년 만에 그의 삶을 이해했다. 아, 모든 예술에는 대가가 있는 법이구나. 가장 절정의 예술은 목숨을 덜어내며 만들어가는 것이구나. 그는 목숨을 덜어내가며 노래를 부르고 있었구나. 그 사람이 그것을 싫어하든 좋아하든, 그것을 하도록 선택된 사람은 그 운명을 살 수 밖에 없는 것이구나. 그는 그의 마지막 남은 목숨의 조각을 <내사랑 내 곁에> 의 절창으로 남기고 떠난 것이구나. 그의 장례식 때도 나오지 않은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내사랑>
육상효 인하대 교수·영화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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