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일 해가 뉘엿뉘엿 저물어가는 저녁. 불고기와 상추쌈이 차려진 밥상에 우즈베키스탄, 캐나다, 일본, 중국 등 지구촌 곳곳에서 온 학생들이 둘러 앉았다. "어제 시험은 잘 봤어요?" 리 라리사(23ㆍ우즈베키스탄)씨가 유창한 한국말로 운을 뗐다. "어어, 난 한국말 너무 어려운 거 같아요. 사촌에 오촌 육촌, 외삼촌도 있고…. 뭐가 뭔지 모르겠어. 휴~." 캐나다 교포 박정균(20)씨의 말은 느릿느릿 어눌하다.
시험도 끝났으니 시내에 함께 놀러가자는 라리사씨의 제안에 미키 아이쥬(24ㆍ일본)씨가 "도서관 가서 공부해야 한다"며 정색했다. 이번엔 중국에서 온 구롱사(23)씨가 끼어들었다.
"아이쥬, 또 공부예요? 우리 중에 한국말을 제일 잘하면서. 한국 친구들마냥 공부를 너무 열심히 한다니까." 주위의 질시 어린 시선에 아이쥬씨가 쑥스럽게 입을 뗐다. "아이, 왜 그래요. 전 남자친구(한국인)랑 결혼해서 한국에 살아야 하잖아요. 그러려면 한국어 더 열심히 공부해야 한다니까요."
'글로벌 밥상'이 차려진 이 곳은 서울 서대문구 신촌세브란스병원 인근 7층짜리 건물에 자리잡은 하숙집. 5~7층에 둥지를 튼 하숙생 34명 중 28명이 외국에서 온 유학생들이다.
러시아 인도 대만까지 포함해 무려 8개국 학생들이 옹기종기 모여 사는 '지구촌 하숙집'이다. 외국인 하숙생 대부분은 연세대 어학당에서 한국어를 배우고 있는데, 전날 어학당에서 치른 시험이 밥상에서도 내내 화제가 됐다.
"라리사, 옷은 또 왜 얇게 입었노, 그러다 감기 걸리면 우짤라고." "아이쥬는 남자친구랑 잘 지내제?" 이들의 대화에 끼어든 카랑카랑한 경상도 사투리의 주인공은 '하숙집 아줌마' 권영자(68)씨. 젊어서 남편과 사별한 뒤 홀로 두 자녀를 키워 결혼시킨 권씨는 14년째 이 곳에서 하숙집을 운영하고 있다.
일 도와주는 아주머니와 함께 30여명의 또 다른 '자녀' 뒷바라지에 여념이 없는 그는 외국 하숙생들에겐 낯선 타향 생활의 든든한 버팀목이다.
이날 밥상에서도 하숙생들은 권씨에게 '긴급 구호'를 요청했다. 인도인 비노트(24)씨가 비자 재발급 신청시 필요한 은행 예치금 300만원 중 60만원밖에 수중에 없으니 도와달라는 것. 한국말이 서툰 비노트씨를 대신해 다른 학생들이 사정을 설명하자, 권씨가 "알았다, 알았어"라며 즉석에서 화끈하게 100만원짜리 수표 2장을 꺼냈다. "나머지 40만원은 내일 은행가서 뽑아서 줄 테니까 너무 걱정 말아라. 알았쩨?"라며 비노트를 안심시킨 권씨.
"너는 인도를 대표하는 기다. 내가 인도를 믿고 돈을 빌려주는 거다"는 우스갯소리까지 던지자 하숙생들 모두 웃음을 터뜨렸다. "비노트, 꼭 돈 갚아야 되겠다. 네가 인도 대표 선수라잖아"라며 라리사씨가 거들자 비노트씨는 "감사합니다"라며 짧지만 진심을 담아 고마움을 표했다.
권씨가 외국 하숙생들을 아낌없이 신뢰하는 만큼 권씨에 대한 하숙생들의 마음도 애틋하다. 공부를 마치고 고국으로 돌아간 뒤에도 연말이면 감사 편지와 함께 자그마한 선물을 보내오는 이들이 적지 않다고 한다. 지난 8월에는 일본으로 돌아간 하세(38)씨가 '청소하느라 고생하신다'며 로봇청소기를 보내오기도 했다.
매주 토요일마다 열리는 '카레파티'도 일본 학생들이 고향에 다녀올 때마다 공수해오는 일본식 카레 분말 덕분에 탄생했다.
올해 3월 한국에 온 벳쇼 시즈요(31ㆍ여)씨는 "일본가면 김치가 비싼 편인데 아주머니가 집에 갈 때마다 김치를 챙겨줘서 일본에 계신 어머니도 많이 고마워한다"고 말했다.
국내 거주하는 외국인 유학생은 2000년대 들어 꾸준히 증가해 지난해 말 현재 6만3,000여명에 달한다. 대학이 밀집한 신촌 지역만 해도 외국인 유학생들이 모여 사는 하숙집이 10여개에 이르는데, 권씨의 하숙집이 연세대 어학당에서 가장 가깝다 보니 어학당을 다니는 외국인들이 일순위로 찾는 곳이다.
특히 외국인들이 기숙사나 원룸 대신 하숙집을 선호한다는 것이 이들 유학생의 얘기다. 벳쇼씨는 "기숙사는 규칙이 까다로워 친구들과 자유롭게 교류할 수 없어서 하숙집을 택해 기숙사를 나왔다"고 말했다.
유학생들에게 하숙집은 교실에서 배운 한국어를 실제로 활용해보는 장소이기도 하다. 우즈베키스탄 대학에서 한국어를 전공한 라리사씨는 지난 3월 한국에 왔지만, 어학당 밖에선 의외로 한국어를 말해 볼 기회가 없었다고 한다.
"한국인에게 먼저 다가가서 말이라도 걸라치면 이상한 사람 보듯 경계하는 것 같아 제대로 한국인들과 깊은 대화를 못 나눴다"는 그는 "하숙집에 들어온 후로 하숙생들끼리 열심히 한국어로 얘기를 나누고 한국인의 따뜻한 정도 느끼게 됐다"고 말했다.
강윤주 기자kkang@hk.co.kr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