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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윤필 기자의 바깥] <25> '직업혁명가' 이일재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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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윤필 기자의 바깥] <25> '직업혁명가' 이일재씨

입력
2009.12.08 02: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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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한 병명을 말하기가 그런 게…, 전반적으로 다 안 좋으십니다. 정신력으로 버티고 계신 듯합니다."

이일재(86)씨. 1923년 대구 생, 6년제 보통학교를 마친 뒤 곧장 제화공장 취직, 화학공장, 담배공장, 군수공장, 철도공장 등을 전전하며 항일 노동조합운동, 해방 직후 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전평) 활동, 조선공산당 입당, 대구 9ㆍ23총파업과 10월항쟁 주도, 미군정 법령13호 맥아더 포고령 위반 구속, 문경탄광 파업 주도 구속, 팔공산 빨치산 정치위원, 1950년 4월 총상 입고 체포, 친지의 도움으로 풀려난 뒤 노동운동 재개, 1968년 7월 남조선해방전략당 사건으로 무기징역 선고, 1988년 가석방, 대구노동정책연구소 활동, 민주노총 지도위원, 사회주의정치연합 준비모임, 2008년 11월 입원…. 일제의 폭압과 이데올로기의 다름에 유난했던 한국의 20세기를 노동운동가로 사회주의자로 꺾임없이 관통해온 자칭 '직업혁명가'의 송곳 같은 이력이다.

지난 2일 오후 경북 성주군 성주효병원. 노태맹(49) 원장은 "오래 버티시긴 힘들 것"이라 귀띔했지만, 그는 꼿꼿했다. 눈빛은 미동 없이 찌를 듯했고, 꼭 다문 입술은 차돌처럼 단단해 보였다. 화법도 다부졌다. 빨치산 시절 한뎃잠으로 얻은 구완와사(안면신경 마비)가 긴 옥고로 악화돼 발음은 흐릿했지만, 그는 군더더기를 추려낸 어절들을 툭툭 끊듯 힘을 실어 말했다. 30분 남짓 인터뷰하는 동안 딱 한 번 웃었는데 그게 정말 웃음이었는지는 불확실하다. 미소에 버무려질 만한 문맥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는 우리에게는 드문 정통 사회주의자다. 알려진 바, 그는 민족주의에 기댄 적 없이 오직 마르크스-레닌의 사적 유물론을 신봉했고, 프롤레타리아 해방 세상을 사상의 조국으로 가슴에 품어온 이다. 어렵사리 그를 수소문했고, 지방의 한 노인요양병원에 입원해 있음을 알게 된 뒤 마음이 다급했다. 왜 그랬는지는 모르겠다. 어쩌면 그가 우리가 기억하는, 혹은 애써 잊고자 하는 어떤 시간의 흔적 혹은 마지막 증인처럼 여겨졌기 때문인지 모른다. 억지로라도 만나 그의 눈빛만이라도 보고 싶었고, 또 묻고 싶었다. 회한은 없냐고. 여전히 역사를 낙관하냐고.

"마스크 벗어버리소. 잘 안 들리요." 신종플루 때문에 병원 측이 건넨 마스크를 그는 마뜩잖아 했다.

_ 후회 없으십니까.

"스탈린주의자로 산 시기가 있었어요. 1953년에 그는 죽지만 이후에도 그 망령은 끈질기게 남아 우리 사회주의 운동과 노선을 병들게 했어요. 소련 중심주의, 인민 경시 관료주의…. 지금은 누구나 그 과오를 이야기하지만 그때는 그게 안 보였어. 그거밖에 없었거든. 구라파에서도 요즘엔 그람시 이후의 경향들 이를테면 '노동자위원회' 같은 조직들이 전면에 섭디다." 그는 연전에 국제 공산주의자 모임인 ICC(International Communist Current)에 개인 자격으로 초청받아 오세철 연세대 명예교수와 함께 네덜란드에 갔던 일, 거기서 보고 듣고 느낀 감회 등을 언급하더니 "ICC 지부가 일본에도 있고, 아프리카에도 있는데 우린 없다"며 아쉬워했다.

_ 인간적 회한을 여쭌 겁니다.

"없어, 그런 건."

_ 가족에게도?

"불고가사(不顧家事)라. 직업운동가가 다 그렇지. 나 때문에 고생한 사람들에겐 미안한 마음 있지만 어쩌겠어." 아들 정건(50)씨가 빙긋 웃으며 흘겨봤는데, 그는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아홉 살에 아버지와 생이별해 친척집에 얹혀 살았고, 연좌제에 묶여 취직도 힘들었다는 아들이다.

이씨가 병석에 눕자 주변 사람들이 '이일재 동지 후원회'라는 걸 만들었고, 그가 쓴 짤막한 회고록과 다양한 정치이론ㆍ정세분석 문건들을 모아 책 <노동자평의회와 공산주의 길> (빛나는전망 발행)을 냈는데, 그 한귀퉁이에 이씨는 자신과 동년배로 지금은 작고한 한 정치인을 거론하며 "(그의) 한 평생을 내 생활의 한 시간과도 안 바꾼다"고 쓰기도 했다.

_ 여전히 역사를 낙관하십니까.

"프롤레타리아 승리의 믿음은 한 순간도 흔들린 적 없어. 그랬으니 지금껏 이렇게 살았고, 그 삶에 대한 자부심이 있어."

그는 시종 엄격한 표정으로 꼿꼿이 인터뷰에 응했고, 나는 브레히트가 1930년대 코민테른 시절의 혁명가들을 위해 썼다는 시 '후손들에게'의 한 구절을 떠올렸다.

'우리가 스러지며 흘린/ 피 속에서 떠오른 그대들은/ 우리의 허물을 말하기 전에/ 모쪼록 기억하라/ 우리가 헤쳐 나온/ 그 어두운 시대를/…/ 우리는 부드러움의 바탕을 마련하고 싶었으나/ 스스로는 부드러울 수 없었다…'

이씨의 삶은 한국사회주의운동사와 별 무리 없이 맞물린다. 조부 이기양은 항일운동가였고, 그와 함께 남조선晩堧晥ゴ?사건으로 투옥된 뒤 옥사한 삼촌 이강복도 공산주의자였고, 외삼촌 최세기는 트로츠키주의자에 가까운 아나키스트였다고 한다. 어려서부터 그는 어른들의 대화와 책을 통해 공산주의의 매력에 젖어 든다. "트로츠키의 <배신당한 혁명> , 사카이의 <계급투쟁의 필연성> , 고바야시의 <게공선> 등을 읽었고 고리키, 톨스토이도 많이 읽었어. 물론 일어본이었지." 그는 프롤레타리아를 동경했고 열여섯 살 때 보통학교를 졸업하자마자 프롤레타리아가 된다. 훗날 제주 4ㆍ3항쟁의 주역이 되는 김달삼, 경성트로이카의 핵심 이재유 등과 교유하며 조선노동당에 입당, 당 지역 간부로 활동한다. 그리고 1946년 9월의 전평 총파업과 대구 10월항쟁을 주도한 뒤 수배되고, 구속ㆍ출소 후 대구 팔공산 빨치산 유격대에 가담해 정치위원으로 활동한다. 그 1년 남짓 동안의 기간을 그는 온 생애를 통틀어 가장 행복했던 때로 기억한다. "춥고 배 고픈 건 아무 것도 아니야. 우리는 아무 감시ㆍ간섭 없는 해방구 안에서 믿는 바대로 살았거든."

지난 10월 진실화해위원회는 이씨의 40~60대 20년과 육신의 건강을 앗아간 남조선해방전략당 사건이 당시 중앙정보부에 의해 조작됐다고 발표했다. "우린 노동운동 세력을 규합해 네트워크를 구축하자는 게 목표였어. 그런 내용을 담아 권혁재 선생이 '남조선해방전략론'이라는 문건을 썼는데, 그게 빌미가 돼 북한 찬양고무, 내란, 간첩, 반국가단체 구성 등 혐의가 날조된 거야." 주범으로 몰린 권씨는 이듬해 사형당했고, 이씨의 삼촌 이강복은 옥사, 함께 투옥됐던 이형락은 1985년 출소 후 자살했다. 모진 고문 끝에 무기징역을 선고받은 이씨는 1988년 가석방됐고, 10년 전인 1999년 김대중 정부에 의해 사면 복권됐다. 사건 당시 재판부는 남조선해방전략당을 조총련 하부조직으로 발표했다. 이씨는 "내 선배들이 북에 가서 미제의 프락치로 몰려 사형 당했어. 우린 북한에 대해 비판적이었어"라며 "통혁당이 학생과 지식인, 인텔리 중심이었다면, 우린 노동현장에 오르그(조직가)로 활동하면서 노학연대를 지향했다"고 말했다.

출소 후 어엿한 성년으로 자라 있던 아들에게 이씨가 한 첫 마디는 "노동운동가 한 사람 소개해달라"는 거였다고 한다. 보안감호 속에서도 그는 현장활동을 통해 시대적 격절감을 극복했고, 조직활동과 비정규노동자 조직화에 열성을 보였다. 한 후배 운동가는 "1년 전만 해도 파업 현장, 농성 현장을 우리보다 먼저 찾아 다니시며 노동자들과 토론하셨다"고 말했다. 쓰러지기 직전까지 그는 젊은이들과 함께 40년 전의 꿈이자 전 세계 공산주의자들의 꿈인 노동자 전위정당 결성을 위해 동분서주했다고 한다. 지난해 사노련(사회주의노동자연합) 사건에 연루됐던 오세철 연세대 명예교수는 "선생은 주류의 교조적이고 권위주의적인 공산주의 운동과 달리, 외롭지만 꼿꼿이 밑으로부터의 혁명운동을 실천한 공산주의자"라며 "서유럽의 탈마르크스주의 이론서들도 모두 섭렵하여 젊은 동지들과 장시간 토론을 마다하지 않았고, 모든 토론과 회의과정에서는 철저하게 평의회 정신과 방식을 지키면서 이를 어기는 젊은 동지들을 나무라셨다"고 회고했다.

이씨 연배의 활동가 가운데 정통 공산주의자는 드물고, 그나마도 대부분 세상을 떴다. 그는 외롭다고 했다. "이야기할 상대가 별로 없어요. 대구에도, 서울에 가도…." 그러더니 "감상적 민족주의나 친북 노선은 딱한 노릇"이라고 덧붙였다. "민족 문제가 없다거나 주요하지 않다는 건 아니지. 하지만 민족주의자가 곧 국가주의자거든. 재벌 회장도 국민이고, 나도 국민이라고 해버리면 계급모순이 덮이잖아."

그는 자신이 매듭짓지 못한 전위당 건설을 두고도 미련은 없다고 말했다. "역사의 흐름에는 시발점도 종착점도 없는 거거든." 그의 자부는 흔들림 없는 전위로 산 생애 끄트머리에 선 회고의 자부가 아니라, 끊임없이 이어져 갈 역사의 흐름 그 첫 자리에 선 자로서의 자부인 듯했다. 요컨대 그는 여전히 자신의 승리가 아로새겨진 '미래의 역사 교과서'를 응시하고 있었다.

브레히트는 시 '후손들에게'의 마지막 연을 이렇게 맺는다. '그러나 그대들이여, 사람이 사람을 돕는/ 그런 때가 도래할 때/ 우리를 기억해다오/ 관대한 마음으로'

서구 자본주의의 20세기를 공산주의자로 살아낸_혁명가로서가 아니라 참여관찰자로서_역사학자 에릭 홉스봄(92)은 2002년 출간한 자서전 <미완의 시대> 머리말에 "내가 얻으려는 것은 역사의 이해이지 동의나 승인, 연민이 아니다"라고 썼다. 혁명가인 이씨가 자신의 책을 통해 원한 바는, 묻지는 못했으나, 아마 달랐을 것이다.

최윤필 기자 walden@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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