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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기표의 나의 꿈 나의 도전] <24> 세속적 욕망 때문에 중이 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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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기표의 나의 꿈 나의 도전] <24> 세속적 욕망 때문에 중이 되지 못했다

입력
2009.12.06 23: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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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신생활을 할 때 한 곳에 오래 머무는 것은 금물이다. 그래서 광명리를 떠나 부산 태종사에 가 있을 요량으로 평소 잘 알던 태종사 도성 스님을 찾아갔다. 절에 좀 있어야겠다고 말씀 드렸더니 기다렸다는 듯이 머리를 깎고 중이 되라고 말씀했다.

그런데 광명리에 있는 짐을 정리할 필요가 있어 광명리로 와, 주인할머니께 갑자기 직장을 수원으로 옮겨 이사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고 말씀 드리고는 짐을 챙겨 나왔다. 이부자리나 조리기구들은 모두 가까운 쓰레기장에 버리고 옷가지 몇 개와 책 몇 권만 가지고 부산으로 내려왔다.

부산에 온 바로 다음날 새벽 아무도 모르게 머리를 깎고 승복으로 갈아입었다. 법명도 미리 스님께서 지어 놓아 '우상(牛墒)'으로 했다. 마치 다른 곳에서 승려생활을 하다가 온 것처럼. 혹 누가 물으면 도성 스님 상좌로 선방을 돌며 수행을 하다 태종사 불사 때문에 잠시 스님을 도우러 왔다고 말하기로 했다.

그런데 나는 임시방편으로 중이 되었지만 스님께서는 이미 나를 중이 되게 할 결심을 하고 있었던 거였다. 그야말로 동상이몽이었다.

공양주보살이 없어 내가 공양주보살의 역할을 해야 했다. 법당 신축공사 인부들 밥해주는 일이 주된 일과였다. 반찬은 주로 시장에서 사왔으나 몇 가지는 절에서 직접 만들었는데, 여름철에는 내가 만든 깻잎조림이 인기였다. 특히 대신동 보살들이 맛있어 했다.

그런데 아침저녁 예불도 드려야 하고 또 제를 올릴 때도 있어, 당장은 아니더라도 내가 예불도 드리고 제도 올려야 할 형편이었다. 반야심경 정도나 외우던 나로서는 외워야 할 경들이 많았다.

그런데 도성 스님께서는 오랜 기간 해인사의 성철 스님을 모셨던 관계로 예불을 드릴 때 '대불정능엄신주'를 꼭 독송했다. 30여 페이지 이상 되는 방대한 양이라 최대한 빨리 독송해서 25분 정도 걸리는 긴 다라니였다. 성철 스님 문하에 들어가려면 1주일 정도 기한을 정해놓고 이 다라니부터 외우게 한다니 얼마나 외우기 힘든 다라니인지를 알 수 있다.

틈만 나면 쉬지 않고 외웠더니 1주일 정도 되어 능엄신주는 물론 천수경까지 다 외울 수 있었다. 그래서 예불은 말할 것도 없고 제도 내가 주관해서 지낼 수 있었다. 스님께서 무척 기뻐하셨다.

그리고 중 생활을 시작한지 한 달도 안 되어 계(사미계)를 받았다. 계사는 조계종단에서 율사로 유명한 선암사의 석암스님이었는데, 나는 이 어른을 평소 무척 존경했다. 무엇보다 거동조차 잘 못하시는 노스님들을 30여분이나 모시고 살았는데, 그 때나 지금이나 이 일이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런데 절 생활에 익숙할 만하니 주지스님께서 시주금 관계로 구속이 되었다. 스님이야 당연히 시주금인 줄 알고 받았겠으나 시주금을 낸 부산진 구청장이 스님과 가까웠던 관계로 무언가 빌미가 되어 구속된 것 같았다.

1심 재판이 끝나면 석방되리라 생각했는데, 1심에서 실형을 받아 석방되지 못했다. 1심에서 유죄인 경우 2심에서도 유죄이기 십상이어서 보통 난감한 일이 아니었다. 담당 변호사를 찾아가 관련 서류를 최대한 수집해서 사건의 내용을 알아보고 내가 항소이유서를 하나 썼다. 사건 자체를 무죄가 되게 하는 일도 중요했지만 그것보다 한평생 수행과 중생교화에만 전념해온 스님이 뇌물사건으로 죄인이 되어서는 안 되겠기에 이를 해명하는 일이 더 중요했다. 특히 신도들에게 스님의 결백을 입증하고 수도승으로서의 스님의 인품을 돋보이게 하고 싶었다.

이 항소이유서 때문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으나 어쨌든 스님은 2심에서 무죄로 석방되었다. 스님은 당연히 내가 항소이유서를 잘 쓴 때문인 줄로 생각했다. 신도들에게 이 항소이유서를 많이 배포했는데, 이 항소이유서를 보고서 스님에 대한 존경심이 더 커진 경우도 많았다.

아무튼 이 일로 나에 대한 스님의 신뢰는 더욱더 커졌고 그에 따라 나로 하여금 진짜 중이 되게 하려는 스님의 결심 또한 더 강해졌다. 해인사 성철 스님을 두 번이나 찾아 뵈었다. 성철 스님 문하생이 되게 할 생각이었다. 그래서 나는 더 이상 절에 있어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했다. 스님께 말씀 드려 봐야 안 통할 것 같아 서울에 볼 일이 있어 간다고 하고는 안 돌아올 생각이었다.

이런 가운데 100일기도 회향을 맞아 7일간 철야기도를 하게 됐다. 스님께서 구속되었다가 석방된 데 따른 분위기 쇄신의 의미가 있었다. 이왕 떠날 몸 기도나 한번 제대로 하고 떠나자 싶어 밥 먹고 화장실 가는 시간 빼고는 꼬박 법당에서 목탁을 치고 염불을 하면서 기도에 정진했다. 철야기도를 몇 번 해본 사람도 힘든 일을 거뜬히 해냈더니 다들 놀라워했다.

철야기도가 있은 며?후 나는 서울에 볼 일이 있다고 하고는 태종사에서 나왔다. 서울에 와서는 스님께 아무런 소식도 전하지 않았다. 돌아오지 않으면 그대로 인정하실 분이었기 때문이다.

사실 나는 스님의 바람도 바람이지만 어릴 때 도를 통한 스님이 되고 싶기도 했던 터라 중이 되어 볼까 하는 생각도 많이 했다. 그러나 결코 중이 되고 싶지 않았는데, 명분상의 이유는 중이 되어서는 세상을 바꿀 수 없으리라는 데 있었으나 실제로는 결혼하고 아이 놓고 세상적 즐거움을 누리는 것을 포기할 수 없었던 데 있었다.

그래서 나는 바르지 못한 행실로 비난 받는 스님이 있는 경우 비난은 받아 마땅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스님이 나보다는 낫다고 생각했다. 나는 세속적 욕망 때문에 스님의 길을 포기했으나 그는 그 길을 갔기 때문이다. 더욱이 젊을 때 우주와 인생의 근본이치를 깨닫고자 일상적으로 맺어진 인연과 욕망을 다 떨쳐버리고 구도자의 길에 들어선다는 것은 너무나 존경스러운 일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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