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1년 9월 말 광주취재본부로 인사 발령이 났다. 그해 10월 1일 국내 신문 사상 첫 전국 동시 인쇄에 맞춰 1년 동안 지방 근무를 하게 된 것이다. 몇 차례 오간 적은 있지만 광주를 생활 근거지로 삼기는 처음이었다. 식사를 겸한 첫 회의를 끝내고 금남로의 한 가라오케에 자리를 잡았다. 첫 술잔을 비웠을 때, 손님 중 누군가가 귀에 익은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노래는 곧 바이러스가 됐다. 모든 테이블의 중년 남성들이 약속이라도 한 듯 노래를 함께 불렀다. <임을 위한 행진곡> 이었다. 광주에 와 있음을 제대로 실감한 첫 날 밤이었다. 임을>
▦<임을 위한 행진곡> 은 1981년 탄생했다. 소설가 황석영씨와 광주의 문화운동가들이 5ㆍ18 민주화운동 당시 시민군 대변인이었던 윤상원씨와 그의 야학 동료 박기순씨를 추모하며 그들의 영혼 결혼식을 주제로 노래극 <넋풀이> 를 만들면서 끝부분에 이 노래를 넣었다. 황씨가 백기완씨의 장시 <묏 비나리-젊은 남녘의 춤꾼에게 띄우는> 을 토대로 가사를 쓰고 79년 <영랑과 강진> 으로 대학가요제에서 은상을 탄 김종률씨가 곡을 만들었다. 이후 <넋풀이> 가 대학가에 전파되면서 <임을 위한 행진곡> 은 민주화 운동에 힘을 불어넣는 대표곡이 됐다. 임을> 넋풀이> 영랑과> 묏> 넋풀이> 임을>
▦<임을 위한 행진곡> 은 이른바 '민중 가요'의 시대적 변화를 구분 짓는 곡이다. 70년대 집회ㆍ시위 현장에서는 대중가요, 외국민요, 복음성가 등이 불렸다. 하지만 80년대 들어서는 <임을 위한 행진곡> 을 필두로 단조의 행진곡풍 곡들이 애창됐다. 특이하게도 <광주출정가> <오월가> <전진하는 오월> 등 5ㆍ18 광주를 소재로 한 노래들 중 상당수는 단조의 행진곡풍이다. 아마도 5ㆍ18의 슬픔과 분노, 절망과 패배감 등을 극복하려는 의도가 반영됐기 때문일 것이다. 또 <임을 위한 행진곡> 은 민중 가요의 대중화를 견인한 곡으로 평가된다. 임을> 전진하는> 오월가> 광주출정가> 임을> 임을>
▦국가보훈처가 5ㆍ18 기념식 때 부를 '5월의 노래'를 만든다. 97년 5ㆍ18이 법정 기념일로 지정된 이후 광주 5ㆍ18묘지에서 기념식이 열릴 때마다 공식 추모곡 역할을 한 것은 <임을 위한 행진곡> 이었다. 5ㆍ18 공식 추모곡이 없었던 것은 누구도 이 노래 외의 다른 곡을 생각하지도, 다른 추모곡의 필요성을 느끼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보훈처가 뒤늦게 공식 추모곡을 만들려는 것은 <임을 위한 행진곡> 이 현 정부 코드와 맞지 않다고 판단한 때문일 것이다. 새 곡에 5ㆍ18 정신을 담으면 된다지만 선뜻 와닿을 것 같지 않아서 벌써 가슴이 먹먹하다. 임을> 임을>
황상진 논설위원 april@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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