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의 스님 일연(一然ㆍ1206~1289)이 지은 <삼국유사> 는 <삼국사기> 와 쌍벽을 이루는 우리 고대사의 보고이지만, 흥법(興法)ㆍ의해(義解)ㆍ감통(感通) 같은 분류 체계에서처럼, 중국 고승전(高僧傳)의 체제를 따른 승전 문학의 성격이 강하다. 권1ㆍ2의 왕력(王曆)과 기이(紀異)를 뺀 나머지 7편은 각 편이 '원효불기'에서처럼, 스님의 이름을 얹어 제목을 삼은 것이 많고, 내용 또한 스님의 전기적 일화를 중심으로 엮었다. 삼국사기> 삼국유사>
<삼국유사> 의 스님 이야기는 '흥법'에서 이차돈 등 6명을 비롯하여, '의해'에서 원효 등 13명, '감통'에서 광덕 등 11명이고, 제5편 '신주(神呪)'에서도 밀본 등 3명의 전기를 다루었다. 이렇게 <삼국유사> 에서는 모두 250명의 스님의 이야기를 다루어, 스님의 이름 하나도 다루지 않고 국가불교시대를 쓴 <삼국사기> 와는 엄청나게 다른 역사책을 썼다. 게다가 <유사> 에는 300개의 절과 사찰연기설화를 다루어 여러 면에서 승전과 중복된다. 유사> 삼국사기> 삼국유사> 삼국유사>
이 가운데서도 '원효불기'는 '의상전교'와 함께 <삼국유사> 승전 류를 대표하는 전기 작품으로, <송고승전(宋高僧傳)> 같은 정전(正傳)이 아니고, 향전(鄕傳)에 전한다는 한두 가지 이상한 일화를 강조하여 써낸 원효전이다. 그 제목에서 벌써 드러나듯이, 원효의 매이지 않는 성격은 그의 전기적 일화로 널리 알려진 요석공주와의 연애담이 중심이다. 그리고 파계한 원효 스님이 뭇 고을로 돌아다니며 춤추고 노래 부르며, 쪽박을 두들겨 참회의 법화를 크게 한 내력이다. 이로써 '원효불기'는 종래의 원효전들과 다른 전기를 이룩했고, 바다용의 권유에 따라 <삼매경> 의 논소(論疏)를 지었다는 대목에서 이야기는 '의해'편의 주제를 만족시켰다. 이야말로 '왕생론주(往生論註)'에 따라, '일체의 거리낌이 없는 자라야 한 길로 생사를 벗어난다(一切無碍人一道出生死)'는 무애의 경지를 기린 셈이다. 삼매경> 송고승전(宋高僧傳)> 삼국유사>
이런 매이지 않는 성격을 일연이 원효전의 중심 주제로 강조한 뜻은 지은이의 역사의식을 대변한다. 원효 스님 당대의 신라 불교는 당나라 불교의 파동에 뒤흔들리며 호국불교로 정치에 야합하였고, 신라는 정치적으로 고구려와 백제의 협공에다 당나라와의 공조도 순조롭지 못했다. 이런 때에 원효 스님은 당나라에 유학하지 않고도 스스로 깨달았고, 매임이 없는 법화로 신라 불교에 새 바람을 일으켰다. 왕실 중심의 계율주의를 벗어나, 촌락을 헤매며 염불하고 춤추며, 몽매한 민중으로 하여금 부처의 이름을 모르는 이가 없게 교화하였다고 했다. 그리하여. '미혹 속에 있음을 스스로 깨달은 자는 벌써 큰 미혹에 있지 않으며, 어둠 속에 있음을 스스로 깨달은 자는 벌써 극심한 어둠에 있지 않다는 것'을 몸으로 보여 주었다.
이렇게 <삼국유사> 는 250명이 넘는 스님의 이름과 신라 '십대덕(十大德)' 가운데서도 원효 스님을 들어, 신라불교의 민족사적 민중 불교의 의미를 훌륭히 역사로 정립했다. 삼국유사>
동국대 명예교수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