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급 시각장애인 안마사 김석진(39ㆍ가명)씨는 요즘 열 한 살 외동딸과 부녀의 정을 쌓아가는 재미에 푹 빠졌다. 딸을 볼 생각에 장애인 활동보조사와 함께 하는 퇴근길 발걸음이 바빠진다. 딸이 "아빠, 들어올 때 먹을 것 좀 사다줘"라고 전화를 걸어오면 그렇게 흐뭇할 수 없다. 서울 강남의 안마시술소에서 일하던 시절엔 느낄 수 없었던 행복이다. 2교대로 밤샘 근무를 하느라 한 달에 두 번쯤 집을 찾던 당시 딸은 가끔씩 얼굴 비치는 아빠를 어렵게 여겼다.
김씨는 10년간의 안마시술소 일을 접고 서울의 한 텔레마케터 업체에 '헬스키퍼'로 취직했다. 장시간 전화 하고 컴퓨터를 들여다보느라 만성적인 목, 어깨, 허리 통증에 시달리는 직원들을 하루 12~16명씩 안마해주는 것이 그의 업무다. 평균 300만~400만원 하던 월 수입은 150만원으로 떨어졌지만, 정규직이고 정시 출퇴근이 가능해 만족한다. "비장애인 동료들과 동등하게 대접받으며 일한다는 사실에 자부심을 느낍니다. 무엇보다 가족과 함께 하는 시간이 늘어서 기뻐요."
기업에 고용된 시각장애 안마사, 헬스키퍼(health keeper)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시각장애인에겐 안정적이고 만족도 높은 일자리를 제공하고, 기업으로선 장애인 고용 의무를 지키는 동시에 사원들의 업무 능률을 높여주는 '윈윈 직종'으로 호평을 얻고 있는 것이다.
1970년대 일본에서 처음 시행된 헬스키퍼 제도는 97년 백화점 매장여직원 대상 시범사업으로 국내에 첫 도입됐다. 하지만 외환위기 여파로 한해 평균 취업자가 1명도 안될 만큼 유명무실하다가 2004년부터 활성화했다. 한국장애인고용촉진공단 관계자는 "2004년 성매매금지법 시행에 따른 안마시술소 위축, 근골격계 질환 근로자 급증 등이 맞물린 결과"라고 말했다. 현행 직업분류상 헬스키퍼는 안마사로 집계돼 정확한 파악은 어렵지만, 몇 년 전만 해도 신규 취업자 수가 손에 꼽을 정도였던 반면 올해는 서울 4개 복지관을 통해 140여명이 취업할 만큼 급증 추세다.
국가 자격증인 안마사 면허는 시각장애인만 딸 수 있다. 실제 시각장애 근로자 8만9,000여명 중 12.3%가 안마사, 7.1%는 안마사 양성교사다. 그러나 주된 일터인 안마시술소가 성매매의 온상으로 여겨져 고충이 많았고 최근 안마시술소 단속 강화로 일자리마저 줄었다. 사면초가에 빠진 안마사들에게 헬스키퍼는 안정적이고 떳떳하게 일할 수 있는 선망의 직업이다. 한국시각장애인연합회 백연숙 팀장은 "시각장애 구직자 80% 이상이 헬스키퍼를 희망한다"며 "주로 밤에 일하는 안마시술소와 달리 비장애인들과 함께 낮에 근무하는 것이 가장 큰 매력"이라고 말했다.
두 초등학생의 엄마인 김영신(39)씨는 헬스키퍼로 제2의 인생을 설계했다. 둘째를 임신 중이던 99년 뇌종양에 걸려 왼쪽 눈을 실명하고 오른쪽 시야도 좁아져 시각장애 1급 판정을 받은 그는 2007년 서울맹학교 직업재활과정에 입학해 안마를 배웠고, 지난 6월 교보생명 강남콜센터에 취직했다. 격무에 시달리는 직원들이 안마를 받고 편안해하면 그는 마치 의사가 된 듯한 자부심을 느낀다고 했다. 그는 "오후 6시에 퇴근하면 아이들과 저녁을 먹고 숙제를 챙겨준다"며 "다른 직업을 가졌다면 이런 일상을 누리기 어려웠을 것"이라고 말했다.
내년 2월 서울맹학교 졸업을 앞둔 김은지(18)양도 졸업과 함께 안마사 자격증을 받으면 정식 헬스키퍼가 되는 것이 꿈이다. 이미 지난달부터 서울 중구 동부화재 콜센터에서 인턴사원으로 일하며 경력을 쌓고 있다. 날 때부터 안질환을 앓아 오른쪽 시력만 조금 남아있는 그는 오후 5시간 동안 콜센터 직원 10여명을 돌보는데, 예약자가 몰려 아침마다 사무실이 떠들썩해진다. 직원 이미영(29)씨는 "계속 컴퓨터를 보며 고객과 상담하다 보니 만성적인 어깨결림과 두통에 시달렸는데 안마를 받으면 통증이 가시고 업무 효율성도 높아진다"고 말했다.
헬스키퍼 채용에 적극적인 곳은 보험사 등의 콜센터, 텔레마케팅 업체, 버스ㆍ택시회사, 백화점 등이다. 오래 앉거나 서서 일하는 탓에 요통, 어깨결림 등 근골격계 질환에 시달리기 쉬운 곳이다. 헬스키퍼의 안마는 안무(쓸기), 유연(주무르기), 압박(누르기), 진전(떨리게 하기), 고타(두드리기), 곡수(구부리기), 운동(관절 움직여주기), 견인(잡아당기기) 등 8가지 기술을 활용, 근육에 섬세하게 자극을 줌으로써 피로 회복은 물론 질환 예방까지 목적으로 한다.
헬스키퍼를 둔 기업들의 만족도도 높다. 동부화재의 이형민 고객지원팀장은 "안마 서비스를 제공한 이후 직원들 표정이 눈에 띄게 달라졌다. 우연인지 몰라도 매달 3, 4명씩 발생하던 퇴직자도 지난달엔 한 명도 없었다"고 말했다.
장애인 고용 활성화에도 청신호다. 현행법 상 근로자 50명 이상 사업장은 총원의 2% 이상을 장애인으로 고용해야 하는데 지난해 이를 어긴 기업들이 낸 부담금이 1,440억원으로 헬스키퍼 7,000명 연봉과 맞먹는다. 헬스키퍼 제도가 알려지면서 기업들이 '벌금' 대신 직원 복지와 회사 이미지에 도움이 되는 안마사 채용에 적극 나설 것이란 전망이 힘을 얻고 있다.
서울맹학교 양회성 직업연구부장은 "아직은 계약직이 많고, 실적에 따라 고수입을 올릴 수 있는 안마시술소에 비해 임금이 낮은 편"이라며 "성매매 단속 강화로 안마사 취업이 어려워지는 만큼 국가적으로 헬스키퍼 제도 확대에 나서야 한다"고 말했다.
이훈성기자
남보라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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