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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의 풍경, 2009] <7> 출판의 변방에서 중심으로, 북 디자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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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의 풍경, 2009] <7> 출판의 변방에서 중심으로, 북 디자인

입력
2009.12.02 23: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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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 북을 만드시나요? 작은 북을 만드시나요?" 경력 20년이 넘는 한 북디자이너는 1980년대 중반 자신의 직업을 '북 디자이너'라고 소개했을 때 이런 질문을 받고 난처했다고 한다. 그럴 만도 한 것이 당시까지만 해도 북디자인이란 개념조차 낯설었다. 편집자들은 국적 불명의 이미지와 검은색 혹은 붉은색으로 된 글자를 조합해 그저 '이 책은 이런 책이다'는 단순한 정보를 전달하는 표지로 책을 만들던 시대였다. 하지만 20여년이 지난 지금, '디자인 때문에 책이 잘 팔리기는 어렵지만, 디자인이 안 좋은 책은 반드시 망한다'는 말은 출판계의 정설이 됐다.

"같은 값이면 다홍치마"

1일 오후 서울 광화문 교보문고 매장. 카툰을 연상시키는 아기자기한 표지, 책의 절반을 감싸는 포켓형 띠지, 반짝반짝거리는 펄(pearl) 장식…. 책이 스스로 자신을 드러내지 않는 것을 미덕으로 여겼던 시대가 언제였나 할 만큼, 대형서점 판매대에 오른 책들은 강렬한 자기 에너지를 발산하고 있었다. 특히 여성들이 주요 독자층인 소설, 에세이 판매대의 경우는 북디자인의 전시장이라 해도 지나친 표현이 아닐 정도.

대학생 정선영(20ㆍ서울 마포구 서교동)씨는 "얼마 전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을 샀는데 시중에 나와있는 10여 종의 책 가운데 소장가치를 생각해 값을 고려하지 않고 디자인이 가장 예쁜 책을 구매했다"며 "꼭 사고 싶은 책은 아니지만 책이 예뻐서 샀다는 친구들도 주변에는 많다"고 말했다. 2000년부터 교보문고에서 근무하고 있는 직원 이아름(27)씨는 "처음 매장에서 일할 때만 해도 표지의 활자들이 비슷비슷했고 예쁘게 띠지를 두른 책도 10%가 채 안됐지만, 요즘은 띠지는 기본이고 하루가 다르게 책의 디자인이 다양해지는 것 같다"며 "오프라인에서 책을 구입하는 독자들의 경우 북디자인이 책 선택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30~40%는 되는 것 같다"고 말했다.

최근 일러스트 표지의 소설집 <서울, 어느날 소설이 되다> 를 낸 정홍수(46) 도서출판 강 대표는 "책의 성격에 잘 맞는 디자인 때문에 책을 구입했다는 이야기를 많이 들었다"며 "출판의 흐름을 만들어가는 층인 젊은 독자들의 눈높이에 맞추기 위해 출판사들은 앞으로 북디자인에 대해 더욱 관심을 기울일 것"이라고 말했다.

영상세대의 독서시장 진입, 웹의 등장

1990년대 이후 북디자인이 화려하게 부상한 데는 여러 요인이 결합됐다. 영상세대가 본격적으로 독서시장에 진입했고, 전집이 몰락한 대신 단행본 시장이 활성화된 데다, 대학에서 우수한 디자인 인력을 배출했기 때문이다. 웹의 등장이 북디자인 활성화를 재촉했다는 분석도 있다. 장은수 민음사 대표는 "웹이라는 강력한 경쟁자가 출현하면서 책은 내용만으로는 승부할 수 없다는 위기의식을 느꼈다"며 "책 고유의 질감을 불러내는 과정이 중요해졌고, 자연스럽게 북디자인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다"고 말했다.

정병규(63), 안상수(57), 서기흔(56), 홍동원(48)씨 등 국내에서 북디자이너의 정체성을 확립한 이른바 '1세대 북디자이너'들의 활발한 활동은 후배 북디자이너 군의 형성을 촉진시켰다. 출판사들은 디자인 인력에 대한 투자도 늘렸는데, 창비의 경우 1990년대 2명에서 현재는 6명의 디자이너를 두고 있으며, 민음사는 디자이너만 20명에 이른다. 국내에서 출판사 소속 디자이너와 프리랜서를 합쳐 현재 활동 중인 북디자이너의 수는 400명 안팎으로 추산되고 있다.

자기표현을 중시하는 신세대의 특성과 북디자인 분야의 궁합이 잘 맞는 점도 북디자이너 층이 두터워진 이유로 꼽힌다. 광고회사에서 4년 동안 일하다가 북디자이너로 전업,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소설 <파피용> 표지 등을 디자인한 스튜디오 미인의 김민정(31)씨는 "북디자인은 좋아하는 디자인을 하면서 발명가처럼 한 가지에 몰두할 수 있는 점이 매력"이라고 말했다. 김 훈씨의 소설 <공무도하> 표지를 디자인한 송윤형(31)씨는 "프리랜서이건 회사에 속해 있건 자기만의 프로젝트를 할 수 있고 혼자만의 성취감을 느낄 수 있는 점에서 북디자인은 젊은 디자이너들에게 매력적인 일"이라고 말했다.

과(過)디자인 , 몰개성 비판도

현재 우리 북디자인의 수준은 출판 선진국인 일본에 필적할 정도로 급성장했다는 것이 출판계의 평가다. 전체적으로 화려하고 역동적이라는 중평이다. 그러나 학술서적에까지 지나치게 화려한 디자인을 하는 등 '과(過) 디자인'에 대한 우려도 나온다. 출판사들이 새로운 시도를 하기보다는 '팔리는 디자인'만 선호한다는 비판도 제기된다.

이석운(35) 석운디자인 대표는 "출판시장이 비교적 좁고 독자들의 성향이 편중돼 있기 때문에 기획 단계에서부터 다양성이 부족하고, 이는 디자인의 몰개성으로 이어진다"며 "출판계에 불황이 이어지면서 출판사들이 판매와 직결되는 북디자인에서 개성있는 디자인, 독특한 디자인을 수용하지 못하는 것 같다"고 아쉬움을 표시했다.

그러나 '과 디자인'이 책 자체의 생존을 위한 피할 수 없는 현상이라고 보는 시각도 있다. 북디자이너 출신인 강무성(47) 열린책들 주간은 "북디자인은 순수예술이 아니라 상품적 매력을 높이기 위한 상업예술인 만큼 시장의 반응을 따라가는 것은 불가피하다"며 "주변 미디어들의 압박으로부터 책의 자기 존재를 지키기 위해 앞으로 북디자인은 더욱 화려해질 것으로 본다"고 말했다.

이왕구 기자 fab4@hk.co.kr

■ 인기끄는북디자인은/ 만화풍 일러스트·글꼴 변형 타이포그래피로 눈길

만화적 감각을 살린 일러스트, 활자를 자유자재로 변형하는 타이포그래피는 요즘 북디자인의 양대 키워드라 할 수 있다.

일러스트를 사용한 표지의 확산은 감각적이고 발랄함을 추구하는 젊은 층의 기호를 반영한 것. 특히 유소년기부터 일본 만화를 보고 자랐고 일러스트 표지가 강세인 일본소설과 친숙한 20~30대들이 주독자층인 소설 분야에서 일러스트 표지는 몇년째 인기를 끌고 있다. 김애란씨의 소설집 <달려라, 아비> (2005), 김려령씨의 청소년소설 <완득이> (2008), 김이은씨의 소설집 <코끼리가 떴다> (2009) 등은 만화를 연상시키는 유머러스하고 재기발랄한 표지가 내용 못지않게 눈길을 모았다.

글꼴을 변형시켜 활용하는 타이포그래피는 '한글 디자인의 재발견'이라는 최근 디자인계의 관심사와 맞물려 북디자인에 적극적으로 활용되고 있다. 정병규, 안상수씨 등 북디자이너 1세대들이 주목하고 있는 분야다. 김용택 시인의 시집 <강 같은 세월> (1995), 최인호씨의 장편소설 <길 없는 길> (2007), 김성종씨의 추리소설 <백색인간> (2008) 등의 표지는 글자를 왜곡ㆍ변형한 타이포그래피의 아름다움을 잘 보여준다. 최근에는 손글씨체를 활용하는 캘리그래피도 북디자인에 적극 활용되고 있다.

이왕구기자 fab4@hk.co.kr

■ 한국출판문화상 역대 수상자 인터뷰/ '현산어보를 찾아서'로 제44회 저술상 이태원씨

신유사옥으로 흑산도에 유배된 정약전은 1814년 그곳에서 우리나라 최초의 해양생물학 도서 '현산어보(玆山魚譜)'를 쓴다. 흔히 '자산어보'로 부르는 이 책은 수산물의 명칭, 형태, 습성, 분포 등을 담은 것으로 정약전이 직접 채집하고 조사해서 집필했다.

약 200년이 지나 '현산어보'를 현대적 감각으로 다시 쓴 책이 나왔다. 서울 세화고 생물교사 이태원(37)씨가 쓴 <현산어보를 찾아서> (청어람미디어 발행). 2002~03년에 걸쳐 모두 다섯 권으로 발행된 이 책은 그 내용과 글쓰기, 저자의 성실함 등에 출판계 안팎의 호평이 이어졌고, 이씨는 2003년 제44회 한국출판문화상 저술상(교양 부문)을 수상하는 영예를 안았다.

이씨는 "한자 '玆'는 '자'로도, '현'으로도 읽는다"며 "정약전이 어떻게 불렀는지 모르지만, 당시 흑산도 일대를 현주(玄州)로 불렀던 점을 감안하면 '현산어보'가 맞을 것 같다. 물론 '현산어보'든 '자산어보'든 책 이름이 중요한 아니다"라고 말했다.

<현산어보를 찾아서> 는 '현산어보'에 나오는 생물의 명칭과 생태 등을 흑산도 주민에게 일일이 확인하고 동시에 정약전의 삶을 찾아가는 기행문 형식이다. "여행을 좋아했습니다. 여행을 하면서 지명에 관심을 가졌고 지명의 변천을 살피다 생물 이름의 변천에 눈이 갔습니다. 민속책, 사전 등을 뒤지며 생물 이름의 유래를 찾던 중 정약전의 책을 읽었습니다. 수산 생물의 200년 전 이름을 보면서 그것이 어떻게 해서 지금 우리가 부르는 명칭으로 바뀌었는지 알고 싶어졌습니다. 그러다가 내가 그것을 해보자는 데 생각이 이르렀습니다."

이씨는 방학 때마다 흑산도를 찾았다. '현산어보'는 물론 생물도감, 노트북 컴퓨터, 사진기, 녹음기를 들고 흑산도의 어부와 상인들을 만나 '현산어보'에 나오는 물고기의 특징과 생김새 등을 이야기하고 그런 녀석이 실제 있는지를 물었다. 가령 '현산어보'의 설명에 따르면 '우어(牛魚)'라는 물고기는 새치가 틀림없는데, 다랑어와 비슷한 새치가 과연 200년 전 우리나라 흑산도 부근에 살았을까 궁금했다. 흑산도의 나이 든 어민들은 이씨의 질문에 "30년 전만 해도 새치 떼가 바다 위로 뛰어올랐다"고 알려주었다.

에피소드도 많았다. 정약전은 장창대라는 사람이 '현산어보'를 쓰는 데 도움을 주었다고 했는데 이씨는 도대체 그의 정체를 알 수 없었다. 그는 인동 장씨 족보?뒤져 장창대라는 인물의 실존을 확인했다. 놀랍게도 정약전에게 도움을 줄 당시 그의 나이는 15, 16세에 불과했다.

이씨는 책을 쓰면서 정약전 시대의 조선을 다시 생각했다고 말했다. "'현산어보'가 훌륭한 책인 것은 맞지만 서양과 일본 등에서는 그같은 책이 그 전부터 많이 나왔습니다. 우리나라는 외부 문물 수용을 거부하고 내부 파벌이 갈려 자연과학 연구에 소홀했던 것이지요. '현산어보'를 통해 그런 역사를 알게 돼 씁쓸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는 "그래도 정약전은 알고 싶은 것은 끝까지 추적하는 호기심 많은 인물, 관습에 얽매이지 않은 창조적 인물이었다"면서 "한국출판문화상을 받은 뒤 '현산어보'에 대한 강연 요청이 밀려드는 바람에 한동안 바쁘고도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고 말했다.

박광희기자 khpark@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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