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남부 도시 칸의 이름이 멀게만 느껴지던 시절이 있었다. 누군가 칸국제영화제 경쟁부문 진출과 수상이 꿈이라고 운운하면 "헛물켜지 마라"고 힐난하던 게 불과 10여 년 전 충무로의 풍경이다. 송일곤(38) 감독은 칸이라는 그 비현실적인 지명에 현실감을 안겨줬던 첫 국내 영화인이라 할 수 있다. 그는 단편영화 '소풍'으로 1999년 칸영화제 단편부문 심사위원대상을 받았다. '소풍'은 IMF구제금융으로 무너져 내린 한 중산층 가족의 집단 자살을 그렸다.
대중에 이름을 알린 계기가 남달라서일까, 송 감독은 흔히 예술영화 감독으로 불린다. 그러나 그는 "애초에 김기덕, 홍상수 감독처럼 영화를 만들고 싶지 않았다"고 했다. 그렇다고 그의 작품들이 딱히 예술이라는 수식어를 거부하는 것은 아니다. 장편 데뷔작 '꽃섬'을 시작으로 '거미숲' '깃' '마법사들'로 이어지는 그의 영화 이력은 예술적 자의식으로 충만하다. 96분의 상영시간 동안 단 한번의 편집도 가해지지 않은 '마법사들'은 그가 품은 예술적 욕망의 정점을 이룬다.
지난 세기 초 태평양을 건넌 쿠바 한인에 초점을 맞춘 그의 첫 다큐멘터리 '시간의 춤'(3일 개봉)도 미학적인 야망을 감추지 않는다. 스크린은 짙푸른 카리브해를 품에 안고,귓가에는 흥겨운 라틴음악이 출렁인다. 낙천적이고 낭만적인 시선으로 삶을 예찬하는 이 작품은 '송일곤 영화 미학'에 한 방점을 찍는다.
출발은 쿠바를 배경으로 한 멜로였다. 눈 내리는 뉴욕을 도망치듯 벗어난 한인 뉴요커가 쿠바에서 한 여인을 만난다는 낭만적인 이야기였다. 송 감독은 쿠바에 대한 자료를 뒤지다 한인 이민사와 마주쳤고, 영화는 다큐멘터리로 그 형식과 내용을 바꿨다. "평소 디아스포라에 관심이 많았고, 쿠바에 대한 호기심도 강했다. 사회주의 혁명 반세기가 흐른 쿠바의 현재가 궁금하기도 했다"고 송 감독은 말했다.
지난 4월말 송 감독과 박영준 촬영감독 등 달랑 3명이 쿠바를 찾아 4주 동안 촬영했다. 쿠바 이민사를 더듬어가며 사람들을 만났고, 그들의 삶을 찾았다. 총 60시간을 촬영해 1시간 30분으로 편집하고, 방준석 음악감독의 음악을 입히는 등 후반작업에 6개월을 보냈다.
그렇게 공을 들인 '시간의 춤'은 다큐멘터리의 고정관념에 갇히지 않는다. 중남미 한인 이민사를 다룬 여느 다큐멘터리들처럼 그들의 신산했던 과거와 견딜 수 없는 향수를 전하려 하지도 않는다. 때로 화면이 시간을 역행하고, 유려한 미장센과 음악이 감성에 호소한다. 송 감독은 "다큐멘터리라는 형식에 구애받고 싶지 않았다"며 "춤을 추듯 시간에 몸을 맡기고 살아가는 쿠바 한인의 모습을 내가 느낀 대로 편집과 음악으로 전하고 싶었다"고 말했다. "일단 카메라를 들이대는 순간 어떤 사람의 일상에는 작은 파장이 일 수밖에 없고 다큐멘터리라 해도 감독의 시선이 들어가게 되기 때문"이라고 그는 덧붙였다.
'시간의 춤'은 아마 그의 영화 이력의 전환점이 될 듯하다. 그는 "'시간의 춤'을 마치고 정말 내가 만들고 싶은 영화가 무엇인지 알게 됐다"며 "영화의 미학적 본질보다 이야기가 더 중요하다는 생각이 들었고, 이제는 상업영화를 하려고 한다"고 말했다.
"저도 청년시절 다 갔잖아요. 20대 후반엔 혼자 소주 마실 돈 몇 푼만 있으면 된다고 생각했어요. 예술가로서 최대치의 꿈을 꿨던 것 같아요. 그런 길을 10년 가까이 걸어왔으니 지금은 제 마음에서 우러나와 만든 영화를, 많은 사람들이 봤으면 좋겠다는 욕망이 커요."
송 감독의 팬이라면 그의 이런 말에 실망스러워할 만도 하다. 그러나 그는 "세상이 바뀌어가고 있고 대중과의 호흡을 위해 버릴 것은 버려야 한다"고 말했다. "물감이 없으면 그림을 못 그리지 않느냐"고 반문도 했다. "영화의 물감은 자본이고, 이야기의 재미로 투자자를 설득할 수 있어야 한다"고 덧붙였다. "투자자의 입맛이 진리라는 것도, 예술적 고집을 버리겠다는 말도 아닙니다. 만드는 방법을 바꾸겠다는 거죠. 매일 시나리오작법을 다시 공부하며 대중영화에 대한 고민을 하고 있습니다."
송 감독은 "멜로와 스릴러 시나리오를 준비하고 있다"고 밝혔다. "칸에서 상을 받으며 원치 않은 삶을 걸어온 것 같기도 하다"는 그는 찰리 채플린의 '시티 라이트'처럼 감동이 넘치는 영화를 꿈꾼다. "이제는 어둡고 긴 터널을 빠져나와 밝고 감동적인 영화를 만들고 싶습니다. 예술가로서의 이상을 많이 고민했으니 이제는 저만의 그림을 그릴 준비가 돼 있는 듯하네요."
라제기 기자 wenders@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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