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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무의 선비 이야기] <11> 김상헌과 최명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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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무의 선비 이야기] <11> 김상헌과 최명길

입력
2009.12.01 00: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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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자호란 때의 일이다. 국난을 당해 조정은 척화파와 주화파로 갈려 다투었다. 김상헌은 척화파(斥和派)의 대표이고, 최명길은 주화파의 대표이다.

척화파의 주장은 이랬다. 명나라는 우리나라의 부모의 나라요, 청나라는 부모의 원수이니 우리의 원수라는 것이다. 더구나 임진왜란 때 명나라는 나라를 구해 준 은혜가 있으니 우리가 망하는 한이 있더라도 청과 일전을 불사해야 한다는 것이다. 싸워 보지도 않고 화의를 하는 것은 안 된다는 것이다. 국가는 망할 수 있으나, 의리를 잃으면 영원히 소생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과도한 모화주의적 명분론이다.

반면 주화파는 명나라를 위해 복수를 하는 위명(爲明)도 좋지만 다급한 대로 나라를 보존하는 존국(存國)이 우선이라는 것이다. 군사력으로 버틸 수 없으면 타협을 해서 일단 급한 불을 끄고 봐야 한다는 것이다. 반정공신들의 현실론이다.

두 주장 중 전자가 절대적으로 우세했다. 그런 점에서 한국인은 명분주의자라 할 만 하다. 청군 15만에 아군 1만의 대결이다. 청군은 당대 동아시아의 최정예군이요 아군은 오합지졸이다. 식량도 한 달 버틸 것 밖에 없었고, 군병들은 진눈깨비 속에서 얼어 죽어가고 있었다.

최명길을 비롯한 주화파가 나섰다. 최명길은 단신으로 적진에 들어가 목숨을 건 협상을 했다. 청군은 척화파 대표들을 잡아 보내라 했다. 홍익한·윤집·오달제가 자원해 심양으로 끌려가 끝까지 저항하다가 처형되었다. 최명길이 항복문서를 썼으나 김상헌이 달려들어 찢었다. 최명길은 찢는 사람도 있고 깁는 사람도 있어야 한다면서 다시 주웠다. 군병들이 견디다 못해 들고 일어났다. 척화파를 모두 잡아서 청진으로 보내라는 것이다. 인조도 항복하지 않을 수 없었다. 김상헌은 목을 맸으나 가족들 앞이라 살아났다.

인조는 삼전도(三田渡)에서 항복했다. 김상헌은 북문을 통해 고향인 안동 학가산 아래에 은거했다. 대간은 공격했다. 최명길이 열어놓은 문으로 왕도 돌아보지 않고 달아났다는 것이다. 위기였다. 그런데 마침 김상헌이 삼전도비를 부쉈다는 헛소문이 돌았다. 용골대가 잡아가자 김상헌은 영웅이 되었다. 심양의 중죄수를 가두는 남관(南館)에 갇혔다. 최명길도 중 독보(獨步)를 보내 명과 밀통했다는 죄로 역시 심양의 사형수 감옥인 북관(北館)에 갇혔다. 김상헌과 최명길은 감옥에서 화해했다. 방법이 다를 뿐이었지 둘 다 애국자라는 것을 인정했다.

그러나 인조는 척화파가 우세한 정국에서 온건파인 소현세자 대신 강경파인 봉림대군을 후계자로 삼아 북벌운동을 벌이게 했다. 송시열의 도움을 받았다. 그러나 효종과 송시열의 북벌론은 달랐다. 효종은 왕권을 강화하는 방편으로, 송시열은 신권을 서인 지배정국을 구축하기 위해 북벌을 부르짖었다. 그 때문에 김상헌의 척화론이 힘을 얻어 19세기에 안동 김씨의 세도정치로까지 이어지게 되었다.

한국역사문화연구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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