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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윤필 기자의 바깥] <24> 절판되는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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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윤필 기자의 바깥] <24> 절판되는 책

입력
2009.12.01 00: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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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본 절단기를 지난 책은 컨베이어 벨트에 실려 뒤편 적재장으로 떨어진다. 오래된 문자의 상형이 말해주듯 冊(책)은 묶여 있어야 책이다. 형식(형태)이 와해된 책의 몸통은 순식간에 폐지로 전락한다. 제 전신(前身)의 신분과 위계에서 놓여난 종이들은 기계적으로 평등해진 적재장의 너른 공간 안에서 분방하게 섞이며 쌓인다. 화려한 헌사를 휘장처럼 두르고 세상에 등장했을 책도, 교과과정에 뒤처진 학습참고서도 다르지 않다.

폐지의 개성과 가치는 철저히 재활용 편의성에 따라 매겨진다. 즉 제 몸에 새긴 활자의 의미나 깊이가 아닌, 펄프 함량과 무게로 분류되고 평가되는 것이다. 그러니 그곳도 절단기의 칼날처럼 반듯하게 평등한 공간은 아닌 셈이다. 종이시장, 책시장에서 귀한 대접을 받던 종이일수록 천대받기 쉽다고 한다. 공장 관계자는 "대체로 비싼 종이일수록 이런저런 화학 처리가 돼 있기 때문에 재생 공정도 복잡하고 펄프 함량도 떨어진다"고 말했다.

1만 권쯤 될까. 지난달 24일 경기 파주시 파주읍 백석리의 책 파쇄공장 ㈜모세시큐리티 마당에는 제 차례를 기다리는 책 더미가 고도(古都)의 고분(古墳)들처럼 군데군데 쌓여 있었다. 오래 손을 탄 책들에서 느껴지는 포슬포슬한 정겨움 대신, 단 한번도 펼쳐진 적이 없는 새 책들은 으레 정결한 위엄을 지닌다. 그 마당에 놓인 책들은 대부분 주인을 못 만났거나 아예 서점 진열장에조차 놓이지 못한 듯 보였다. 아마도 그 책들은 책 공장에서 출판사 창고로 옮겨진 뒤 해마다 조금씩 조금씩 후미진 곳으로 밀려나다 결국 이곳, 책의 도살장으로 보내졌을 것이다. 그들은 여전히 정결했으나 위엄은 권력을 찬탈 당한 어린 임금의 눈빛처럼 애잔했다.

파쇄공장에서 자동차로 40분 남짓 떨어진 경기 고양시 서구 가좌동의 출판사 들녘 책 창고. 60평 규모의 샌드위치 패널 건물 세 동에는 갓 찍어낸 신간부터 나온 지 10년도 지난 스테디셀러 소설, 찾는 이 드문 재고 인문서적 등 수백 종의 책이 반듯반듯 쌓여 있었다. 잘 나가는 책과 갓 만든 책은 당연히 찾기 쉽고 이동이 쉬운 자리를 넓게 차지한다. 바닥에 아무렇게나 섞여 쌓여있는 책도 200권 남짓 있다. 창고장 황광진씨는 "서점에 불이 나서 그을음이 묻기도 하고, 운송 중에 물에 젖거나 뜯기는 경우도 있죠. 그렇게 반송된 책들은 부득이 파본해야 합니다."

시커먼 스프레이 칠이 된 책 무더기가 보여 살펴보니 10년쯤 전에 출간된 일본 소설 <시귀(屍鬼)> 다. 오싹한 이야기의 대중적 소설이지만 서사의 무대인 외진 산골마을의 몽환적 분위기와 결말부의 애잔한 감동이 인상적이어서 책꽂이 귀퉁이에 여태 꽂아두고 있는 책이다. 산 자의 생명과 죽은 자의 생명, 인간과 시귀의 욕망이 엉켜 선험적 선악의 경계를 흔들던 그 책이, 아이러니하게도 삶의 경계 너머로 밀려나려는 것이다. "판권계약 만료가 임박했는데, 임원회의에서 재계약을 안 하기로 결정났어요. 몇몇 외서 출판 에이전시는 계약이 끝난 책의 유통을 차단하는 데 철저해서 저렇게 스프레이를 뿌려서 물증 자료를 보내줘야 합니다." 들녘 편집부장 선우미정씨는 일본과 독일 쪽 에이전시들이 특히 엄격하다고 귀띔했다.

책의 출판계약은 대개 5년 단위로 맺어진다. 계약기간이 지난 책은 제작ㆍ유통이 안 된다. 그래서 출판사는 계약기간 내에 소화할 정도의 책만 찍는데, 관행적으로 재고 소진을 위해 계약서에 1년 남짓의 유예기간을 둔다. 그 기간까지 안 팔린 책은 회수해서 파본한다. 이른바 절판이다.

재계약 여부, 곧 절판 결정은 판매 추이에 대체로 좌우된다. 사업적 관점에서 볼 때, 예외적인 경우가 아닌 한, 아무리 공들여 만든 양서도 안 팔리면 짐이다. 짐을 처분하면 창고 임대료 등 보관비용을 줄일 수 있고, 세제를 통해 얼마간의 손실 보전도 가능하다. 책을 만든 사람으로서야 어느 책이든 소중하겠지만, 특별히 애착하는 책을 절판시켜야 하는 경우도 있을 것이다. 선우미정씨는 짧게, 하지만 어미를 잔뜩 늘여 "정말 안타깝죠…"라 하더니 어떤 책은 두어 권 살려뒀다가 아껴줄 만한 사람에게 선물하기도 한다고 덧붙였다.

분서(焚書)처럼 권력의 박해로 책이 떼죽음당하는 일이 지난 세기에도 있었고, 지금도 어떤 맥락에서 부분적으로 그런 일이 있지만 세상이 문명화하면서 그같은 야만의 입지는 줄어들었다. 하지만 지배이념 혹은 풍속 보호의 명분으로 법 권력이 특정 책의 판매를 금지하는 예는 여전하다. 출판사 고도가 2000년 8월 출간한 사드의 <소돔 120일> 도 출간 직후 곧바로 판금된 비운의 책이다. 사드의 주저인 이 책은 '패덕의 유형학'이라 할 만큼 성도착의 극단을 치달아 심지어 번역자조차 표지에 자신의 이름을 밝히길 거부한 책이다.

하지만 알다시피 이 책은 한 독자의 서평처럼 "이성의 세기에 합리주의를 전복시킨 문제작"으로 칭송되기도 하고, 성심리학자나 문화사학자 등 인문 분야 전문가들의 필독 도서로 꼽히기도 한다. 출판 전부터 적잖은 화제를 낳았던 이 책은 초판 8,000부를 찍었는데, 회수되기 전 짧은 유통기에 얼마간 팔렸고, 회수 과정에서 또 얼마간 유출됐을 것이다. 그렇게 세상에 잠입한 몇 권의 책은 현재 인터넷 중고서점에서 10만원(정가 1만5,000원)을 호가한다. 18세기 저작인 만큼 저작권은 없을 테고, 번역만 새로 하면 되니 다시 살려볼 계획은 없냐고 물었더니 출판사 관계자는 "그 책 판금시킨 게 국민의 정붑니다. 현 정부가 그때보다 더 진보적이라고 보십니까"라고 반문했다. 이 경우처럼 어떤 책은 시장에서의 생명활동 자체를 통해 그 사회의 정체성을 드러내는 주요 기표가 된다. <소돔120일> 은 고도보다 10년 먼저 새터라는 출판사에서 두 권으로 출간했으나 비슷한 운명을 겪은 바 있다.

파쇄공장으로 넘어가는 책은 무게로 환산돼 그때 그때 폐지 시세대로 가격이 매겨진다. 창고위탁관리업체인 천리마의 장종호 사장의 말. "책 한 권 무게는 450g 정도 되는데 코팅이 돼서 재활용이 힘든 표지와 제본 부위를 뜯어내고 나면 약 300g쯤 돼요. 요즘 폐지 단가는 ㎏당 120원 남짓이니 책 한 권 값이 40원쯤 되는 셈이죠." 통상 1만원짜리 책 한 권의 순수 제작비용(종이값+인쇄값+제본값)은 3,500원 내외이고, 이 가운데 약 절반이 종이값이라고 한다(80g/㎡ 미색모조지 기준).

장 사장은 "회사 이미지보다 당장의 생존이 절박한 영세 출판사 중에는 '나까마'(중간상)를 통해 재고 서적을 권당 300원, 500원씩에 넘기기도 한다"고 말했다. 그런 책들이 헌책방으로 흘러들어가 정가의 30~50% 선에 유통된다. 그는 폐기 과정에 시장으로 유출되는, 이른바 유령서적들은 극히 드물다고 말했다. "적발되면 회사 문 닫고 쇠고랑 차야 하는데 누가 그런 모험을 하겠어요?"

모세시큐리티는 이름처럼 보안회사였다. 책뿐 아니라 은행이나 기업, 관공서 등에서 폐기해야 하는 수표 등 유가증권이나 정보 문서들을 대량 위탁받아 파쇄하는, 회사 홍보담당자의 설명으로는 국내 최대 규모의 회사였다. 그런 탓인지 보안과 고객 프라이버시 보호에 예민했다. 회사 관계자는 "출판사 관계자나 저자, 번역자들은 멀리서 책 표지 색깔만 봐도 자기네 책인 줄 안다"며 쌓여 있는 책과 절단 공정의 사진 촬영은 안 된다고 했다. 그가 취재를 꺼린 것은 영업 불이익을 우려했기 때문이지만, 나는 인연의 프라이버시를 생각하며 마음을 접었다. 책들이 사람과 맺어온 직ㆍ간접적인 인연. 거기에는 필자나 역자, 편집자뿐 아니라 이름없는 한 독자의 기억도 포함될 것이다. 어떤 이유에서든, 사랑이 짓밟히는 광경은 쓰라리다. 설령 그 사랑이 지금은 잊힌 옛사랑이어도.

고래(古來)의 명망가들은 책의 가치를 떠받드는 숱한 잠언을 남겼다. 그리고 우리에게도 책을 높이는 성향이 남아 있다. 그것이 긴 세월 동안 문자문화를 전유했던 지배층의 이데올로기 때문이든 문화적으로 빈한했던 기층민들의 콤플렉스 탓이든, 책은 물신의 전일적 지배가 완성됐다는 이 시대에도 미미하나마 가치의 프리미엄을 인정받는 몇 안 되는 상품 가운데 하나다. 매주 그런 새 책은 쏟아져 들어오고, 어떤 책은 시장 바깥으로 쫓겨난다. 그리고 세상은 새 책의 목록을 의무인 양 챙긴다.

날은 금세 저물었다. 파주의 짙고 아름다운 노을은 절판되는 책들이 만장처럼 드리운 그림자에까지 스며들지는 못했다.

최윤필 기자 walden@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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