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 수 있는 용기를 낼 때, 함께 이길 수 있습니다."
한완상(73ㆍ사진) 전 대한적십자사 총재가 지난 17년 동안 언론과 나눈 대화를 책으로 묶었다. <우아한 패배> (김영사 발행). 1993년 5월 15일부터 2009년 8월 21일까지, '월간조선'부터 '르몽드 디플로마티크'까지, 종과 횡으로 모두 폭이 넓다. '때문에'라는 협애한 상호주의에서 벗어나 '불구하고'라는 사랑의 마음을 갖자고, 그러면 당장은 지더라도 역사 속에서 우아한 승리로 남을 거라고, 책에서 한 전 총재의 목소리는 반복된다. 우아한>
"5~6년 전만 해도 '역사의 종언'이란 얘기가 유행처럼 번졌죠. 시장 영역에서나 정치 영역에서나 승자는 확고해 보였습니다. 하지만 지금 그것들이 허무하게 무너지는 것을 보잖아요. 승자만 예찬 받는 세상은 근본적으로 한계가 있습니다. '때문에'에 집착하는 이들은 패배를 비참하게만 여깁니다. 그러나 '불구하고'를 실천하는 이의 패배는 우아할 수 있습니다."
책은 김영삼 정권 출범 초, 통일부총리로 정부에 참여해 이인모 노인 북송을 결정하던 때의 이야기로 시작된다. 남한의 40여년 만의 전향적 조치에 돌아온 북한의 대응은 핵무기비확산조약(NPT) 탈퇴. 한 전 총재는 "그때는 남과 북 모두 상대를 누르고 이기려고만 했다"고 안타까워했다. 그래선지 경색된 현재의 남북 관계를 놓고도 "관계가 껄끄러울수록, 대화와 교류를 지속시키는 힘은 '내가 져줄 수도 있다'는 자세"라고 거듭 강조했다.
책 속의 대화는 모두 25가지다. 한 전 총재가 이런저런 자리의 현직으로 있을 때의 대화가 정중한 인터뷰 형식인데 비해, 책의 뒷부분을 채우는 최근의 대화들은 논객들 사이의 토론에 가깝다. '개혁이 좌초하면 더 큰 위기가 온다' '보수 언론의 의도를 넘어서' '또 한 명의 김구 선생을 잃었다' 등의 제목을 단 대화에서는 오늘의 한국을 날카롭게 해부하는 원로 사회학자의 공력이 느껴진다.
"21세기 지식인의 역할은 자기를 비워 남을 채워주는 일입니다. 민주화 시절에 앞서서 투쟁의식을 심어주고 그랬던 것과는 다를 거예요. 시장과 정부를 모두 믿기 어려우니, 지식인들이라도 나서서 그 일을 해야 할 거예요. 자신을 비울 수 있는 사랑의 힘, 그것보다 더 진보적인 힘은 없을 겁니다."
유상호 기자 shy@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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