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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아리] '그냥 존재하며 늙어가는 청춘'

입력
2009.11.29 23: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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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년 전 '공시족(公試族)'이란 말이 유행했다. 대학생이나 또래의 청춘들이 공무원이나 교사가 되고자 만사를 팽개치고 강남으로, 노량진으로 학원을 전전하며 '취업고시'에 매달렸다. 당시 한국일보는 그러한 세태를 풍자하여 '가늘고 길게 살자'는 특집기사를 다루었다. 그들의 신념은 한결같았다. "승진도 필요 없고 고액연봉도 싫다. 그저 스트레스 덜 받고, 가정에 충실하며, 가늘고 길게 직장생활을 하는 게 최상이다."

그 사이 세계적 경제위기가 닥쳤고, 사회에 첫 발을 내딛는 청춘들에겐 굵으냐 가느냐의 선택을 넘어 살아 남기 자체가 힘들어졌다. "인생이 길다지만 흘려보내는 데 급급하다. 그들은 오래 존재했을 뿐이다"라는 로마 철학자 세네카의 말이나, "기개를 잃고 냉소의 얼음에 덮여 있다면, 그대는 스무살일지라도 늙은이라네"라는 20세기 교육자 새뮈얼 울만의 시는 이미 그들에겐 '고인(故人)의 옷'이다.

수입과 안정만 추구하는 세태

우리의 청년들이 '오래 존재하고 싶어하는 스무살 늙은이'로 되어가고 있다는 소식은 우울하다. 최근 통계청은 15~29세 청춘들에게 일하고 싶은 직장과 그 이유를 물은 사회조사 결과를 발표했다. 전국에서 3만7,000여명을 대상으로 실제 문답을 했다니 실상을 잘 반영했을 터이다. 공기업을 선택한 청춘이 17.6%로 대기업(17.1%)을 앞질렀다. 이 수치는 공무원인 국가기관 근무(28.6%)를 제외한 별도의 비율이다.

국가를 위해 일하겠다는 공무원이나 공공사업으로 국민복리에 기여하려고 공기업직원이 되겠다는 다짐은 청춘의 꿈과 야망에 부족함이 없다. 헌데 이들 청춘이 '공(公)의 직업'을 좇으며 밝힌 이유를 보면 그게 아니다. 중요한 선호 요인으로 수입(27.6%)과 안정성(25.0%)을 내세웠으니, 두둑한 호주머니를 오래 차고 다닐 수 있는 방편으로 그것을 염두에 두었다는 얘기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청춘들이 직업을 선택하는 중요한 동기였던 발전ㆍ장래성이나 보람ㆍ자아성취 대목은 각각 10.5%, 9.5%로 한참 뒤에 밀려나 있다.

통계청의 조사가 의미를 갖는 대목은 3~4년 전에 비해 국가기관 공무원 선호도는 비슷하거나 오히려 줄어든 반면, 공기업 선호도가 계속 높아지고 있으며 그 이유를 갈수록 수입과 안정성에서 찾고 있다는 점이다. 혹 통계청 조사에서 "공기업이 어떤 곳이고 무슨 일을 하는지 아느냐"는 질문을 붙였다면, 많은 청춘들이 '철밥통'이나 '신이 내린 직장'이라고 대답할 터이다. 우리의 청춘들이 알고 있는 공기업 직원의 모습은 그것이 전부인 듯하다.

그렇다면 부모 덕이나 자신의 운으로 일찌감치 '수입과 안정성'이 확보된 경우 직업을 가질 이유가 없어지고, 그냥 존재하고 이미 늙어가는 청춘들이 됐다는 얘기다. 그러다 보니 다른 청춘들이 장래성이나 자아성취에 가치를 두지 못하는 것은 오히려 당연할 수도 있다. 이러한 사회와 국가는 발전할 수 없고, 무엇보다 청춘들 개개인이 불행해지고 퇴보의 인생을 짊어지게 될 수밖에 없다.

공기업의 존재 자체에 그 책임을 돌리는 것은 아니나, 그것이 잘못 운영되고 그릇되게 알려져 청춘들의 의식까지 황폐화한다면 문제가 작지 않다. 국가가 공기업을 서둘러 개혁해야 함은 물론이지만, 직장을 선택하려는 청춘들은 최소한 공기업이 어떤 곳이고 무슨 일을 하는 곳인지는 알고 선택해야 한다. 10년 후, 지금의 청춘들이 사회의 중심에 섰을 때까지 지금의 공기업이 그렇게 유지되지는 않을 것이다.

멀지않은 공기업의 변화ㆍ개혁

개인에 의해서든 국가에 의해서든 사회는 무섭게 변하고 있다. 그 변화는 더욱 가속화할 게 분명하다. 불과 10여 년 전에 번성했던 사업들이 흔적도 없이 사라졌으며, 상상도 못했던 일자리들이 사회를 이끌고 있다.

하지만 변하지 않은 것은 청춘들이 발전과 장래성, 보람과 자아성취에 매진했을 때 개인과 사회, 국가의 발전이 가능하다는 점이다.

정병진 논설위원 bjjung@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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