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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문화] 열린 미술관의 신호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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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문화] 열린 미술관의 신호탄

입력
2009.11.29 23: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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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복궁 맞은편에 기무사가 있었다는 걸 올해 처음 알았다. 그 앞을 오가면서도 철조망이 쳐진 담과 위병들의 기세에 눌려 건물 쪽으론 눈길 한 번 주지 못했는데, 그 자리에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을 조성하겠다는 정부 발표를 보고서야 그게 기무사였구나, 새삼 놀랐다.

사실 군 정보기관인 기무사에 대해 나 같은 소시민은 모르는 게 당연하다. 10.26 사태 뒤 기무사의 전신인 보안사 사령관이 정권을 잡지 않았다면, 윤석양 이병이 거기서 자행한 민간인 사찰을 폭로하지 않았다면, 아마 보안사든 기무사든 영 모른 채로 살았을 것이다. 하지만 석연치 않은 역사 때문에 그 이름을 알게 되었고, 내내 어두운 기억을 갖고 있었다.

그래서일까, 미술 전시회가 열리는 옛 기무사 건물로 들어서는데 등골이 서늘하다. 서슬 푸른 위병은 없지만, 겨울 추위와 낡은 건물이 어두운 기억과 맞물린 탓이리라. 지난달부터 이곳에서는 <신호탄> 이란 제목의 전시회가 열리고 있다. "시민들에게 굳게 닫혀 있던 옛 기무사 터가 열린 미술관으로 거듭나는"것을 알리는 신호탄이라는데, 설명을 듣지 않아도 전시를 보고 나면 이해가 간다.

전시는 정문 바로 앞 본관부터 시작된다. 1929년 건축가 박길용이 설계한 3층짜리 본관 건물은 겉모습은 평범하지만 속은 요지경이다. 복도를 따라 늘어선 방들은 어느 틈에 또 다른 방으로 이어지고, 한없이 계속될 것 같던 동선은 갑자기 막다른 벽에 부딪혀 끊어진다. 여느 전시장과 달리 일방통행의 직진이 불가능한 구조다. 덕분에 걸음은 느려지고, 방마다 펼쳐진 작가들의 상상에 오래 마음을 주게 된다.

전시는 본관에서 별관, 온실, 도서관, 운전병대기소, 뒷마당과 담벼락까지 구석구석 이어지며 기무사 터 전체를 거대한 미술품으로 만들고 있다. 바닥이 뜯기고 전선이 드러난 날것의 공간에서 58명의 작가들은 저마다 개성을 자랑하고, 공간은 그 개성들을 조율해 또 다른 작품을 탄생시킨다. 전시장과 작품이 어울려 새로운 텍스트로 태어나는 걸 보니 가슴이 설렌다.

그런데 이런 흥분을 누릴 날도 얼마 남지 않았다. 12월 6일 전시회가 끝나면 대대적인 공사에 들어가서 2013년 새로운 미술관이 들어선다. 쓸데없는 걱정인지는 몰라도, 나는 이 '대대적인 공사'가 마음에 걸린다. 툭하면 지난 세월의 흔적을 부수고 새로 짓기를 능사로 아는 세상 탓이다.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이 들어설 자리는 조선왕조의 소격서가 있었고, 제국 의대의 진료실이 자리했으며, 수십 년간 금기의 장소로 어둑한 소문을 피워냈던 곳이다. 건축은 공간을 짓는 것이요, 공간은 시간과 함께 존재하는 법. 그런 남다른 역사의 흔적을 지우고 첨단 건축물을 짓는다 해서 과연 그곳이 지금처럼 강력한 힘을 가진 공간이 될 수 있을까?

영국인이 최고의 도시로 꼽는 뉴캐슬에는 제분소를 개조한 발틱 현대미술관이 있다. 공간의 특별함 덕에 전 세계 관광객이 찾는 명소가 된 곳인데, 철거비용을 아껴 작가들을 지원하고 미술관의 기획력을 키운 것으로도 유명하다.

기무사 터는 발틱보다 더 많은 이야기가 깃든 공간이다. 우리가 그곳을 참된 혁신의 정신으로 개조하고 건축비를 아껴 작가들을 지원한다면, 새로 태어날 현대미술관이야말로 한국 미술의 새 출발을 알리는 신호탄이 될 것이다. 또 나라 빚을 줄이는 데도 한몫 할 테니 예술과 생활이 공존하는 신호탄도 될 수 있으리라.

김이경 소설가ㆍ독서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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