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다해요(답답해요). 하나요(화나요)."
지난달 초 서울시립은평병원의 '다문화 정신건강 클리닉'을 찾은 중국 출신 결혼이주여성 양양(25ㆍ가명)씨가 어눌한 한국말로 털어놓은 증상은 '화병'이었다.
"만사가 귀찮다"는 그녀가 하루 종일 하는 일이라곤 두살배기 아들과 집에 틀어박혀 TV를 보는 것뿐이었다. 중국에선 쾌활한 성격이었다는 그녀는 집 밖에 나가기도, 남편과 대화를 나누는 것조차도 싫다며 무기력증을 호소했다.
결혼 당시엔 드라마에서 봤던 한국인들의 풍족한 삶을 기대했지만, 현실은 딴판이었다. 일용직 근로자인 남편의 수입으로는 변변한 집은커녕 옷 한 벌 마음 놓고 사기도 어려웠다.
그런데도 주위에 선심 쓰기 좋아하고, 어머니 말이라면 무조건 "네" 하는 남편도 답답하게만 보였다. 한국말이 서툴러 불만을 제대로 얘기하지 못하는 자신이 답답해 말을 꺼내면 버럭 소리부터 지르기 일쑤였다.
은평병원 민성길 원장은 양씨에게 우선 비슷한 처지의 주부들을 만나보라고 권했다. 양씨는 지방자치단체의 다문화가정 교육 프로그램에 참여해 중국인 친구들을 사귀고 남편과 함께 주 1회 클리닉을 찾아 속 깊은 대화를 나누면서 조금씩 활기를 되찾았다.
민 원장은 "주부들이 친구들끼리 수다를 떨며 스트레스를 많이 해소하는데, 결혼이주여성들은 언어 장벽으로 딱히 얘기할 상대가 없다는 게 문제"라며 "불만을 속 시원히 털어놓고 그 얘기를 누군가 들어주는 것만으로 큰 도움이 된다"고 말했다.
대한우울ㆍ조울병학회가 2003년 국내 주부 1,000명을 조사한 결과 44.6%가 우울증세를 보여 세계 평균(25%)을 크게 웃돌았다. 결혼이주여성에 대한 조사는 없지만, 우울증세 비율이 더 클 것으로 추정된다.
박원명 우울ㆍ조울병학회 이사장은 "한국 주부들이 가족을 위해 희생을 강요 받는 문화 탓에 다른 나라에 비해 우울증세 비율이 더 높은데, 결혼이주여성들은 낯선 타향살이에 말도 서툴고 2세들의 정체성 문제까지 겪어 정신과 치료가 필요한 사람이 상당수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고 말했다.
실제 은평병원 '다문화 정신건강 클리닉'을 찾은 결혼이주여성들은 문화적 차이에 따른 갈등, 한국인들의 멸시 등 다양한 고민을 털어놓았다. 중국 출신 저우웨이(31ㆍ가명)씨는 한국 문화를 이해하지 못해 심각한 고부갈등을 겪고 있는 경우.
어릴 때 죽음을 목격한 이후로 장례식 가기를 꺼렸다는 그에게 친척 장례식장에서 며칠씩 밤을 새우며 조문객을 맞는 일은 견디기 힘든 고역이었다.
명절 때 여성들만 힘들게 일하는 것도 이해할 수 없어 불만을 늘어놓았다가 시어머니와 충돌을 빚었고 대화가 잘 통하지 않다 보니 감정의 골은 더욱 깊어졌다. 고부 갈등은 남편과의 다툼으로도 이어졌다.
필리핀 출신 바자르차(35ㆍ가명)씨는 한국인들이 자신을 욕하지 않을까 하는 강박증세에 시달리고 있다. 7년 전 한국에 온 이후로 어눌한 한국말을 할 때면 쏟아지는 시선과 무시하는 듯한 사람들 태도에 주눅이 들었던 그는 급기야 "도둑년"이라고 욕하는 환청에 시달려 병원을 찾게 됐다고 한다.
8월 문을 연 은평병원 '다문화 정신건강 클리닉'은 결혼이주여성과 외국인 근로자를 대상으로 한 국내 유일의 전문 상담 클리닉이다. 민 원장을 비롯해 정신과 전문의 3명이 상담하고 있는데, 진료비는 전액 무료이며 입원할 경우는 50% 감면해준다.
그러나 아직 이곳을 찾는 이들은 많지 않다. 병원 측이 10월 각 자치단체 다문화가정지원센터에 7개 국어로 제작된 포스터를 배포하는 등 적극 홍보하고 있지만, 상담환자는 아직껏 15명에 불과하다.
민 원장은 "이민 문화가 앞선 미국과 일본 등에선 이미 이들을 위한 전문 상담 병원이 활성화돼 있지만, 한국은 이제 시작단계"라며 "많은 이주여성들이 상담 필요성을 느껴도 '미친 사람' 취급을 당할까 봐 도움을 청하기를 꺼려 병을 더 키우고 있는데, 일선 기관들이 이들의 정신과 상담을 적극 권장해야 한다"고 당부했다.
박철현 기자 karam@hk.co.kr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