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리핀에서 최소 57명이 사망한 최악의 정치테러가 발생하면서 글로리아 아로요 대통령이 정치적 압박을 받고 있다. 아로요 대통령측이 사건의 배후로 지목된 지방 군벌의 혐의를 조작ㆍ은폐하고 있다는 의혹이 제기되는 데다 여성 희생자가 상당수 발생, 인권문제로까지 비화하면서 국내외의 비난이 쏟아지고 있다.
필리핀 남부 민다나오섬의 마긴다나오주에서 23일 발생한 이번 테러에 대해 현지 경찰은 이 지역을 지배해 온 주지사 안달 암파투안 일가와 이에 도전한 망우다다투 일가의 정치적 갈등을 원인으로 보고 있다. AP, AFP통신 등 외신은 "망우다다투 일가에서 내년 주지사 선거후보등록을 위해 보낸 일행이 무장괴한에게 납치ㆍ살해됐다"며 "용의자로 암파투안의 아들이 경찰의 지목을 받고 있다"고 전했다.
아로요 대통령은 24일 마긴다나오주에 국가비상사태를 선포한 데 이어 "(관련된 이들은) 예외 없이 법의 심판을 받게 할 것"이라고 천명했다. 하지만 강경한 말과는 달리 신속한 범인 검거와 처벌에 미온적 태도를 보이고 있다. 심지어 아로요는 자신의 측근과 국방장관을 암파투안 일가에 보내 사전에 입을 맞춘 것으로 드러났다.
현지 방송과의 인터뷰에서 특사인 제수스 두레자는 "(여기 온 목적은) 누가 잘못했는지 밝히기 위해서가 아니라 협력을 요청하기 위해서"라고 밝혀 엄정 수사의지와는 거리가 멀다는 비판의 목소리가 높다. 인권감시단체는 이날 "암파투안과 아로요 정부의 친분관계는 공정수사를 돕기보다는 방해ㆍ지연시키는 것 같다"고 우려를 표했다. 국방장관 출신으로 내년 대통령 선거 후보인 길버트 테오도로는 "용의자에 대한 빠른 체포와 기소를 촉구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아로요 대통령이 암파투안 일가 수사에 망설이는 이유는 양측의 공생관계 때문이다. 필리핀 현지 방송인 ABS CNB는 "2004년 대선에서 암파투안 일가가 대대적인 부정 선거를 통해 아로요 대통령을 지지했다"고 언급했다. 그 결과 아로요는 마긴다나오주 일부 지역에서 몰표를 얻었으며, 심지어 등록 유권자 수보다 더 많은 표를 얻은 지역도 있었다.
아로요 대통령이 이들을 비호할 수 밖에 없는 또 다른 이유는 암파투안 군벌이 2001년부터 지역치안을 책임지고 있기 때문이다. 민다나오섬은 중앙정부의 영향력이 미치지 않는 무법천지로 최소 세 개의 무슬림 무장단체가 활동하며 납치와 보복 살인 등이 횡행하고 있다. 이번 테러는 인권 문제로까지 번질 조짐이다. 지금껏 정치 테러는 여성과 노약자를 제외하는 게 관행이었지만 이번 테러에서는 망우다다투의 아내와 동생 등 여성 21명이 강간 후 살해 당했다.
최지향 기자 jhchoi@hk.co.kr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