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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에 풀칠 힘들어…" 아직 흉흉한 태안/ 기름사고 2년… 아물지 않은 상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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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에 풀칠 힘들어…" 아직 흉흉한 태안/ 기름사고 2년… 아물지 않은 상흔

입력
2009.11.26 23: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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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 바다와 너른 갯벌은 겉모습으론 이태 전 초겨울의 악몽에서 벗어난 듯 하다. 그러나 누대에 걸쳐 그 바다와 갯벌에 의지해 살아온 사람들의 가슴은 여전히 시커먼 기름 범벅이다.

유조선 기름유출사고 2주년(12월7일)을 10여일 앞둔 25일 오전 충남 태안군 소원면 의항2리 개목항. 사고 전 어선과 사람들로 북적이던 포구는 황량했다. 이 마을 150가구 300여명의 생계 터전이었던 300여㏊의 굴 양식장은 흔적조차 없다. 기름을 뒤집어 써 못쓰게 된 양식장 시설은 지난 8월까지 모두 철거했다고 한다.

굴 양식장을 바삐 오가며 통통하게 살이 오른 굴을 실어 나르던 선외기 등 30여척의 소형 어선은 갈 곳을 잃고 선착장에 묶인 채 모래먼지를 뒤집어 쓰고 있었다. 사고 전 굴 까기 작업을 하느라 밤 늦도록 불을 밝혔던 30여개의 '굴막'도 텅텅 비어 있었다.

간간이 포구를 오가는 주민들도 더 이상 어민의 모습이 아니었다. 굴 자루가 들려있어야 할 이들 손에는 삽과 곡괭이가 쥐어져 있었다. 희망근로 작업에 참여해 마을 어귀 낡은 집을 허물고 쓰레기를 치우는 이들도 눈에 띄었다.

지난해 기름방제 현장에서 품을 팔아 겨우 해를 넘긴 주민들은 올해는 일당 3만5,000원을 받는 희망근로 작업으로 근근이 생계를 이어왔다. 하지만 이마저도 이달 말이면 작업이 끝나 대부분의 주민들은 당장 겨울 날 일이 막막한 처지다.

'검은 악몽'은 마을 인심까지 바꿔 놓았다. 주민들은 사고 전 봄, 여름에는 갯벌에서 낙지를 잡고 가을, 겨울엔 양식장에서 굴을 따 가구당 연 평균 3,000만원 이상의 소득을 올렸다.

이런 풍요 속에서 주민들은 '내 것 네 것 없이' 살붙이처럼 나누며 인정 넘치게 살았다. 그러나 돈줄이 마르자 서로 손해를 보지 않으려 따지고 예전 같으면 웃고 넘어갈 사소한 시비에도 언성이 높아지는 일이 잦아졌다.

마을 어촌계장 이충경(39)씨는 "어촌 일은 공동작업이 많아 주민간 신뢰가 중요한데, 마을 공동체가 무너지고 주민들끼리 서로 반목하는 일이 많아지는 상황이 걱정스럽다"며 한숨을 토했다.

주민들은 "언제까지 정부에 손 벌려 먹고 살 수는 없다"며 자구책 마련에 안간힘을 썼다. 이웃 어촌에서 기른 굴을 가져다가 굴 까기 작업을 하는 것이 그 중 하나였다. 그러나 굴의 품질이 떨어져 오래 가지 못했다. 굴까기 작업을 주도했던 이충경씨는 500만원의 손해를 고스란히 떠안기도 했다.

주민들에게 항구적인 생계 대책은 굴 양식장 복구뿐이다. 그러나 양식장 복구는 요원하기만 하다. 복구 작업에는 수십억원이 필요하지만 국제유류오염보상기금(IOPC)에서 피해 보상이 언제 이루어질지 알 길이 없다. 보상이 되더라도 양식장 시설을 하고 종패묶기 등 작업을 하는데 2년이 걸리고 상품성 있는 굴을 생산하려면 2∼3년을 더 기다려야 한다.

당장 생계가 막막한 주민들의 애타는 가슴엔 벌써 한겨울 찬바람이 불고 있다. 이날 희망근로에 참여해 구름포 해수욕장 백사장에서 쓰레기를 줍던 권모(65ㆍ여)씨는 "30여년간 굴을 따며 살아왔다"며 "이달 말이 지나면 희망근로 수입도 끊겨 추운 겨울을 어떻게 날지 걱정이다"고 말했다.

이모(50)씨는 2년간 목돈을 만질 수 없게 되자 학비를 마련할 길이 없어 대학생인 두 아들을 군대에 보냈다고 했다. "연말에 수협에 갚아야 할 이자 마련할 길도 막막해요. 태안시내와 인근 서산으로 날품을 팔러 다니기도 했지만 두 내외 입에 풀칠 하기도 빠듯한 상황입니다."

일부 외지인들의 몰지각한 행동이 주민들 마음에 깊은 상처를 내기도 한다. 올 들어 바다 생태계에 변화가 생겨 굴 양식장이 있던 갯벌에는 바지락이 자리를 잡기 시작했다. 비록 적은 양이지만 주민들은 바지락을 채취해 간간이 푼돈을 만지면서 새로운 희망을 품었다. 그런데 갑자기 나타난 외지인들이 바지락을 싹쓸이 해가 주민들의 속을 뒤집어 놓았다.

의항리뿐이 아니었다. 근흥면 가의도에서는 주민들이 희망근로 작업에 나간 사이 외지인들이 몰래 들어와 마을공동어장의 자연산 홍합을 모두 훑어가는 어처구니 없는 일도 있었다.

희망근로 작업이 끝나고 나면 2년 만에 잡는 홍합을 팔아 겨울 난방비를 마련하려 했던 섬마을 주민들은 허탈감에 빠졌다. 이장 주동복(79)씨는 "외지인들이 몰래 가져간 공동어장의 홍합은 주민들의 생계수단"이라면서 "도와주지는 못할 망정 쪽박까지 깨버리는 행동"이라며 분통을 터뜨렸다.

태안=이준호 기자 junhol@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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