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 말에는 이색이 불교신자인가 아닌가를 가지고 다투었다. 이성계 등 조선의 건국세력은 이색이 주자학자가 아니고 불교신자라고 폄하했고, 이색을 지지하는 측에서는 이색이 불교를 비판하고 주자학을 부흥했다고 주장한다.
이색은 사대부 가문에 태어나 성리학자로 일생을 보냈다. 그러나 당시는 불교가 국교인 시대였던 만치 불교와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었다. 그의 시문집을 보면 어려서부터 많은 승려들과 교류했으며, 8~19세까지 여러 절을 돌아다니면서 공부했다.
그리하여 불교를 좋아하고, 부처는 대성인이라느니, 지성(至聖)ㆍ지공(至公)하다느니 하면서 부모의 명복을 빈다는 명분으로 불사를 인정하기도 했다.
심지어는 1376년(우왕 2) 나옹혜근(懶翁惠勤)이 죽자 왕명으로 그의 탑비명을 지어주고, 아버지 대부터 숙제로 되어 있던 대장경의 인성을 수행했다. 그리고 말년에는 간화선(看話禪)에 심취해 상당히 깊은 선(禪)의 경지에 이르렀다고 한다.
이에 이성계파인 오사충(吳思忠)과 조박(趙璞)은 이색이 '유생의 영수로서 불교를 숭상해 대장경을 인쇄하기에 이르렀다', '유종(儒宗)으로서 부처에 아첨해 사람들의 심술을 무너트리고, 풍속을 패란시켰다'고 공격했다.
다분히 정치적인 의도가 내포되어 있는 비판이다. 이색의 불교신앙은 창왕 대에 백련회(白蓮會)를 개최하는 것으로 절정을 이루었다. 이를 두고 개혁파들은 이색의 이 불사가 불교도들에게 방자하게 자기 주장을 말할 수 있는 용기를 갖게 했다고 비난했다.
그러나 이색은 유학자로서 높이 평가되고 있다. 아버지의 덕이기는 하지만 일찍이 원나라에 들어가 그곳 국자감(國子監)에서 3년간이나 구양현(歐陽玄) 등에게 주자학을 배워와 고려에 전수하는 역할을 했다. 특히 1367년(공민왕 16)에 성균관 겸대사성으로서 정몽주 등 겸교관들과 함께 4서5경재를 만들어 주자학을 보급한 공은 크다.
뿐만 아니라 그는 불교 자체를 공격하지는 않았지만 불교의 세속적인 부패에 대해서는 맹렬히 공격했다. 고려 말에는 귀족과 사원의 토지겸병(土地兼幷) 압량위천(壓良爲賤)으로 국가의 근간이 흔들리고 있었기 때문에 이를 비판한 것이다.
고려말 유학자들의 주자학 이해는 크게 3단계로 나누어 볼 수 있다. 1)도입기(충열~충혜왕조), 2)이해기(공민왕~우왕조), 3)대불투쟁기(창왕~공양왕조)가 그것이다. 도입기에는 원나라로부터 주자서를 도입하는 시기였고, 이해기는 그러한 책들을 연구ㆍ이해하는 시기였으며, 대불투쟁기는 그렇게 연마한 주자학 이론을 가지고 불교를 공격하는 시기였다.
이 중 이색은 둘째 단계인 성리학에 이해기에 속하는 인물이다. 그러므로 비록 부패하기는 했지만 당시에 국교로 되어 있는 불교에 대한 관심이 깊을 수밖에 없다. 따라서 불교 자체를 공격하기 보다는 불교의 현실적 비리를 비판하는 수준에 머물러 있었던 것이라고 생각한다.
한국역사문화연구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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