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방서에서 나왔습니다. 이 좋은 세상에 태어나서 왜 죽으려고 합니까?"
"소방관이면 불이나 꺼. 나 같은 인생 실패자는 죽게 놔두란 말이야."
"왜 본인이 인생 실패자라고 생각하십니까?"
"당신이 경찰이야? 나 취조해? 자꾸 짜증나게 하면 나 진짜 뛰어내린다."
당황한 협상관은 건물 옥상 난간에 매달린 남자를 진정시키려 애썼지만 허사였다. "다섯 세고 죽겠다"고 선언한 남자는 정말 숫자를 세더니 괴성을 지르며 몸을 던졌다. 5분만에 상황 종료. 주 협상관을 비롯한 소방관 협상팀 4명은 머쓱한 표정을 지었고, 관객은 웃음을 터뜨렸다.
지난 18일 경기 용인시 경찰대에서 '자살 시도자 위기협상'을 주제로 열린 역할극 장면이다. 역할극은 경찰대가 16~20일 국내 최초로 개설한 '제1기 위기협상 전문과정'의 핵심 프로그램으로, 이날은 자살 시도와 가정 폭력, 다음날은 정신질환자와 무장탈영병의 인질 사태를 주제로 했다.
이번 과정엔 경찰, 군인, 소방관, 교도관 등 23명이 교육생으로 참가했다. 교육 효과를 높이려 사이코드라마 등을 전문으로 하는 한국심리극예술치료연구소(대표 오수진) 단원들이 상대역을 맡았다.
임무 실패엔 따끔한 지적이 따랐다. 자살 기도자 역을 맡은 배우 백주현씨는 "내 얘기는 안 듣고 냉정한 목소리로 자기 필요한 것만 캐물으니까 절망적인 생각이 더했다"고 말했다. 최성재 경찰대 교수는 "취조식 대화법은 상대에게 압박을 준다. 협상가는 정보를 얻는 대신 도움을 주러 왔다는 신뢰를 줘야 한다"고 지도했다.
교육생들이 맞춰 입은 파란색 점퍼엔 'Crisis Negotiation'(위기협상)이란 문구가 새겨져 있었다. 할리우드 영화에서 흉악범으로부터 인질을 솜씨 좋게 구출해내는 니고시에이터(Negotiatorㆍ인질협상가)를 금세 떠올릴 만하지만, 인질협상은 위기협상의 일부에 불과하다.
이종화 경찰대 교수는 "위기협상은 가정 폭력, 자살, 정신이상자 난동 등 인명 피해가 우려되는 상황을 포괄하는 개념"이라면서 "미국 통계를 보면 타인의 목숨을 담보로 요구를 관철하려는, 고전적 의미의 인질 사건은 위기협상 상황의 20%에 불과하다"고 말했다.
일촉즉발의 대치 상황을 해결하는 방법은 진압 아니면 협상이다. 하지만 진압 방식은 극도로 흥분한 인질범을 자극해 무고한 인질을 희생시킨다는 지적이 꾸준히 제기됐다. 진압 중 사상자 발생 확률이 무려 78%에 이른다는 통계도 있다.
미국은 1972년 뮌헨올림픽 테러 유혈진압을 계기로 연방수사국(FBI)과 지역경찰에 전문 훈련을 받은 협상요원을 배치, 치안사건에서도 위기협상을 활용해왔다. 덕분에 협상 사건의 95%를 인적 피해 없이 마무리하는 성과를 거두고 있다.
최성재 교수는 "위기 상황은 구체적 계산 없이 감정을 표출하려는 이들이 우발적으로 일으키는 경우가 대부분이라, 협상가가 대화를 통해 혼란을 가라앉혀 주는 것이 적절한 해결책이 된다"고 설명했다.
국내에서 위기협상은 아직까지 생소한 개념이다. 전담 조직은 물론이고, 전문가 양성 과정도 찾아보기 힘들다. 경찰, 군, 해경에 전문 협상팀이 있지만 테러 발생시에만 동원된다. 이렇다 보니 위기협상은 현장 요원이 진압에 필요한 시간을 벌고자 떠맡는 가욋일 취급을 받고 있다.
예컨데 자살 기도 현장에 가장 먼저 투입되는 소방구급대원이 현장 대응 지침으로 삼을 매뉴얼조차 없다. 지난해 6월 부산에서 경찰특공대원이 자살 시도자를 구조하려다 함께 추락해 순직한 사건도 위기협상에 취약한 현실을 보여준다는 지적이다.
19일엔 무장탈영병의 인질 대치를 가정한 역할극 교육이 있었다. 군인 교육생 4명이 협상팀을 이뤄 식당 주인을 볼모로 삼은 채 변심한 애인을 데려오라는 '김 상병'과 자기를 괴롭힌 선임병을 처벌하라는 '백 일병'을 상대했다.
탈영병을 흥분시키지 않고 1시간 가량 대화를 이끌어가는 협상관의 실력이 예사롭지 않다 했더니, 육군종합행정학교에서 협상론을 가르치는 황태호 소령이었다.
교수들의 호평에도 황 소령은 "강단에서 가르치던 인질범 처리 지침이 현장에선 무용지물이었다. 많이 배웠다"며 몸을 낮췄다.
최성재 교수는 "처음 위기협상에 나설 땐 협상가가 스스로를 약자라고 여길 수도 있지만, 조금만 경험해 보면 인질범에 비해 훨씬 우위에 있음을 알게 될 것"이라며 "시간은 협상가의 편이다.
인질범이 반드시 먼저 지치게 마련이니 기다리는 법을 배워야 한다"고 조언했다. 군은 이번 교육 내용을 바탕으로 현재 제작 중인 '협상 지휘관 핸드북'을 대폭 수정할 방침이다.
경찰대는 미국 최초로 1973년 위기협상팀을 조직한 뉴욕 경찰과 경찰학 교육기관 '존 J. 컬리지'가 공동 개설한 전문가 과정을 이수한 이종화 교수, FBI 교?과정을 수료한 최성재 교수를 주축으로 이번 과정을 개설했다.
이종화 교수는 "용산참사, 평택 쌍용자동차 사건 이후 대화와 협상을 통한 문제 해결이 대안으로 떠오르는 만큼, 이번 과정 개설을 계기로 각 기관에 위기협상팀이 신설되기를 기대한다"고 말했다. 경찰대는 앞으로 경비업체 등 민간 기관에도 교육 과정을 개방할 방침이다.
김경준 기자 ultrakj75@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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