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하일 고르바초프 전 소련 대통령, 레흐 바웬사 전 폴란드 대통령,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가 베를린 장벽 붕괴 20주년인 11월 9일 보른홀머 다리를 함께 걸었다. 그 장면은 사회주의가 종말을 고하고 냉전이 종식되던 1980년대 말 격동의 날들을 되돌아 보게 했다.
동서 베를린을 가르는 상징적인 경계였던 보른홀머 다리, 소용돌이치는 역사의 주역이었던 고르바초프와 바웬사, 35살의 동독 물리학자로 20년 전 베를린 장벽을 넘어 통일 독일의 총리가 된 메르켈, 모두 공산국가 출신인 그들의 감회가 전파를 타고 생생하게 세계로 전해졌다.
어느날 갑자기 왔던 독일 통일
"자유를 얻기 이전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자기 나라를 떠날 수 없었고,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형무소에 있었고,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고통을 겪었는지 오늘 우리는 잊고 있다"고 메르켈 총리는 말했다. 그는 경호원을 물리치고 수십만 군중들과 함께 20년 전 자신이 넘어 온 길을 다시 걸었다.
베를린 장벽이 붕괴된 현장을 볼 수 있었다는 것은 나의 기자생활에서 가장 큰 행운이었다. 그 때를 생각하면 손에손에 생필품을 사 들고 베를린 시내를 헤매던 동독인들의 모습이 떠오른다. 비닐 쇼핑백 속에는 으레 바나나가 있었다. 그들은 자유와 풍요에 홀려서 거리를 떠돌았다. 기진맥진할 때까지, 해가 저물 때까지 그들은 헤매고 다녔다.
베를린에 살고 있는 한국인들도 거리를 떠돌았다. 거리를 가득 메운 동서독인들 속에서 한국인들은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우리는 언제나 저들처럼 왕래할 수 있을까. 우리는 언제나 저들처럼 통일할 수 있을까 라고 만나는 한국인마다 서로 묻곤 했다. 붕괴된 장벽을 가득 채운 글 중에 "다음은 한국이다"라는 글도 보였다.
1989년은 사회주의 국가들이 뿌리 채 흔들린 격변의 해였다. 6월에 중국에서 천안문 사태가 터졌고, "바르샤바 동맹국 내정에 불간섭하겠다"는 고르바초프의 선언으로 동유럽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8월에 헝가리가 오스트리아와의 국경을 개방하자 동독 관광객 수 만 명이 헝가리로 몰려갔다. 체코로도 수 만 명이 몰려갔다. 10월에는 동독의 라이프찌히에서 대규모의 반정부 시위가 터져 베를린 장벽을 구축했던 에리히 호네커 공산당 서기가 사퇴했다.
11월 9일 오후 6시55분 동독 선전상 귄터 샤보브스키가 기자회견에서 "국경 규제를 풀겠다"고 밝혔고, "언제부터?"라는 기자의 질문에 실수로 "즉시"라고 대답했다. TV를 본 사람들이 국경으로 몰려갔고 모든 초소가 열렸다. 베를린 장벽은 28년 만에 붕괴됐다.
국경이 붕괴되자 사실상 통일이 왔다. 동독은 무정부상태에 빠졌다. 12월 19일 헬무트 콜 서독 수상이 드레스덴을 방문하자 동독인들은 "헬무트 헬무트"를 연호했다. 다음해 8월 23일 동독 인민회의는 동독의 독일연방공화국 편입을 의결했고, 10월 3일 독일은 통일됐다.
독일이 그렇게 갑자기 통일 되리라고 예측한 사람은 없었다. 역대 독일 총리들은 주변국들의 반대로 독일 통일이 힘들 것이라고 말했었다. "독일 통일은 어렵다. 이 지구상에 독일 통일을 원하는 나라가 있는가"라고 헬무트 콜 총리는 말했다. "통일? 아마 한국이 먼저 통일될 것"이라고 빌리 브란트 총리도 말했다.
아무도 모를 '그날', 다음은 한국
그러나 통일은 주변국이 원하든 원하지 않든 동독 내부의 폭발로 이루어졌다.고르바초프는 "나와 콜 총리의 통찰력은 뛰어나지 못했다. 장벽이 그렇게 빨리 붕괴할 것이라고 예측하지 못했었다"고 회고했다.
북한은 베를린 장벽 붕괴 20주년을 맞아 "우리는 동독과 다르다"고 주장하고 베를린 장벽 붕괴의 교훈은 남조선이 냉전시대의 낡은 대결의식에서 벗어나는 것이라고 말했다. 독일 통일의 진정한 교훈은 통일이 예측하지 못한 어느 날 갑자기 올 수 있으며, 어느 주변국도 내부의 폭발을 막을 수는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오늘 남과 북을 다시 생각하게 된다. 다음은 한국이다.
장명수 본사 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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