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ㆍ2시위'는 요원의 불길처럼 확산되어 갔다. 사전에 계획된 것이지만 10월 4일 서울법대, 10월 5일 서울상대에서 시위가 있었다. 그리고 뒤이어 연세대, 고려대 등 전국 대학에서 중앙정보부 해체, 유신헌법 철폐, 박정희정권 퇴진 등을 요구하며 시위를 벌였다.
그런데 '10ㆍ2시위'는 분명히 '김대중납치사건'의 책임을 묻기 위해 시작된 것으로 '김대중납치사건의 진상을 규명하라', '중앙정보부를 해체하라' 등이 중요한 구호가 되었는데도, 그 뒤 '10ㆍ2시위'는 유신독재 반대투쟁일 뿐 '김대중납치사건'과 관련 지어 보는 일은 거의 없었다.
1979년 '부마민중항쟁'의 경우도 김영삼 당시 신민당 총재의 제명 등 김영삼씨에 대한 박정희 정권의 탄압이 중요한 계기가 되었는데도 '부마민중항쟁'과 김영삼씨를 관련 짓는 일은 거의 없다시피 하다.
그리고 '5ㆍ18광주민중항쟁'의 경우도 그 첫 출발은 김대중씨 구속과 관련되었다고 봄이 타당할 텐데도 뒷날 '5ㆍ18광주민중항쟁'의 원인과 경과 등을 정리한 글에서 김대중씨 구속과 광주민중항쟁을 관련 짓는 일은 거의 없다시피 하다.
물론 이런 일은 역사가 명망가 위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민중 위주로 이루어진다는 나름대로의 역사관에 따른 것이겠으나 사실은 사실대로 밝히는 것이 옳을 것이다. 역사적 사실이 역사적 평가보다 더 중요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명망가와 관련된 일이 민중투쟁의 계기가 된다고 해서 그것이 민중사관에서 벗어나는 것은 아니겠기에 더욱 더 그렇다.
'10ㆍ2시위'가 전국으로 확대되면서 사회정치적 분위기가 완전히 반전되었다. 철옹성처럼 여겨졌던 유신독재체제가 언제 붕괴할지 모르는 사상누각처럼 보이기까지 했다. 겨울철이 가까워 이번 투쟁으로 박 정권을 물러나게 하지는 못하더라도 내년 봄에는 물러나게 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되는 분위기였다.
이런 와중에 나는 10월 24일경 후배 이모군을 만나러 다방에 갔다가 경찰에 체포되고 말았다. 연행되어 가보니 치안본부 대공분실이었다. 뒷날 악명이 높았지만 그 당시에는 그런 기관이 있는지조차 몰랐다. 내가 연행되어 갈 당시에는 치안본부 대공분실이 남산 1호터널 입구 쪽 남산기슭에 있었다.
방에 들어가자마자 거물을 잡아들였다고 희희낙락해 하는 분위기였다. 곧바로 키가 190㎝는 되어 보이는 건장한 사내가 들어왔다.
다짜고짜 '학생놈이 공부는 않고 무슨 데모냐', '여기는 학생운동 취급하는 곳이 아니고 간첩 잡는 곳이야. 너 같은 놈은 간첩보다 더 나쁘기 때문에 잡아온 거야' 등의 말을 지껄이면서 구둣발로 닥치는 대로 차고 짓밟았다. 죽는 줄 알았다. 평소 학생운동에 원한이 맺힌 사람 같았다.
이 사람이 뒷날 박종철 고문치사사건으로 구속까지 된 치안본부 대공분실장 박처원이었다. 무서운 사람이었다. 자기는 간첩 잡는 일만 한다고 엄청 강조했고, 또 그렇게 보이기도 했으나, 뒷날 그의 행적을 보니 철저한 권력의 하수인에 불과했다. 김근태에 대한 야만적 고문과 더불어 박종철을 고문으로 죽게 한 장본인이니 말이다.
어쨌든 혼비백산한 폭행 후 '교육'을 받았다. 사실대로 말하고 살아남을 것인지 거짓말하다 죽어서 나갈 것인지 선택하라는 거였다. 특히 '김대중을 납치한 사람이 중앙정보부라는 것을 누구한테 들었느냐'는 것과 '심재권이 있는 곳을 대라'는 거였다. 학생시위와 관련해서는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그래서 조서 한 장 꾸미지 않았다.
무엇을 알고 싶었던 게 아니라 고문할 명분을 만드는 거였다. 기어이 옷을 군복으로 갈아 입힌 후 지하실로 끌고 갔다. 작은 사무실 바닥에 깔려 있는 큼지막한 철판을 들어내니 지하통로가 있었다. 원형계단을 내려가니 고문실이다. 온갖 고문 용구들이 다 있었다.
자기들이 다루기 편한 위치에 눕혀놓고는 마지막 협박을 했다. '여기서 당하면 살아남더라도 3년 이상 살지 못한다'는 거였다. 그러고는 팔을 꺾으면서 가슴과 배를 마구 짓밟았다. 지쳤다 싶으면 다른 팔로 바꾸었다. 결국 실신하고 말았는데, 이것은 무엇을 알아내기 위한 고문이 아니라 일부러 골병을 들이기 위한 폭행이었다.
그러고서 나를 온돌방으로 데리고 가 쉬게 했다. 그 후 나는 그 온돌방에서 20여일간 아무런 조사도 고문도 없이 신문이나 잡지를 보며 시간을 보냈다.
그러던 어느 날 박처원이 자기방으로 불렀다. 훈시용 발언을 한참 하고는 문서를 하나 보여주었다. '대통령 경호실장 박종규' 이름으로 된 것인데, 그의 허락이 없이는 나의 신병을 다른 수사기관에 넘겨서는 안 된다는 거였다.
차차 그 경위를 알게 되었는데, '김대중납치사건'의 주모자가 이후락 중앙정보부장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고 또 박종규 대통령 결호실장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는 터라 이번 시위사건을 주도한 내가 박종규라고 주장하지 않은 것은 다행인지만 혹 나의 신병이 중앙정보부나 검찰로 넘어가 박종규라고 주장할까 싶어 그런 일이 없도록 나를 치안본부 대공분실에 감금해 두고 있었다.
그 문건을 나에게 보여줄 이유가 전혀 없는데도 보여준 것은 전적으로 박처원의 과시욕 때문이었다. 나는 그곳에 있는 동안 여러 차례 그의 방으로 불려갔는데, 자기자랑이 보통 심하지 않았다. 자기에게는 계급(당시의 그의 계급은 경정)이 문제가 아니란 거였다. 자기는 대통령 경호실의 특명에 따라 움직인다는 것을 엄청 자랑했다.
그런데 그는 나에게 지대한 관심을 갖고 있었다. 1979년 내가 전주교도소에 수감돼 있을 때 면회를 오기도 했으니까. 왜 왔는지는 모르지만.
하여튼 한심한 일이었다. 대한민국이 초비상상황에 처했는데도 권력자들이 책임회피를 위해 국가기관까지 동원하고 있었으니 말이다.
결국 나는 그곳에서 20여일 지낸 후 25일간의 구류처분을 받고 서대문경찰서 유치장으로 옮겨져 특별감시를 받았다. 나의 신병을 다른 수사기관에 넘기지 않기 위한 조치였음은 물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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