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시아 코번 지음ㆍ김엘리 옮김/삼인 발행ㆍ519쪽ㆍ2만5,000원
서문에 앞서 '감사의 글'이 실렸는데 그게 좀 길다. 21쪽 분량. 여기엔 저자가 책을 쓰기 위해 직접 인터뷰한 12개국 250여 여성운동가와 단체의 이름과 사연이 빼곡하다. 유럽의 선진국부터 미국, 콜롬비아, 팔레스타인, 시에라리온 등 세계 각지에서 '전쟁과 군대'라는 성역에 도전하는 여성들의 이름이다. 책의 원 제목은 'From where We stand'. 그 제목처럼 이 책은 지금 '우리가 서 있는 곳에서', 전투적인 또는 선지자적인 여성의 목소리로 씨줄과 날줄을 이룬 포연 자욱한 세계 지도처럼 읽힌다.
저자 신시아 코번은 페미니스트 작가이자 런던 시티대학에서 사회학을 연구하는 학자. 또 국제적인 여성평화단체 '위민 인 블랙'의 활동가로, 지난 10여년 동안 무력분쟁과 평화정착 과정에서 나타나는 젠더(gender) 문제에 관한 글을 써 왔다. 저자는 군사화와 전쟁을 접한 다양한 여성들의 사례를 종합해 한 가지 공통점을 추출하는데, 그것은 여성들이 단순히 '평화를 지향하는' 것을 넘어서 군사주의와 전쟁에 반대하기 위해 집단적 운동을 추진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 책의 논지에 따르면 전쟁은 비정상적 상태나 딴 세상의 유물이 아니라 우리가 사는 세상의 한 부분이자 우리의 삶을 구성하는 한 요소다. 자연히 전쟁은 일상과 연관되고, 젠더와 섹슈얼리티 체계와 맞물려 있다. 따라서 여성들의 평화운동은 단순히 전쟁을 반대하는 것이 아니라, 전쟁 체제와 은밀히 내통하고 있는 모든 차별적 구조와 권력관계에 저항하는 일이다. 저자는 여성들의 평화운동을 "지극히 정치적인 행위"로 규정한다.
'남성=폭력, 여성=평화'라는 어정쩡한 생물학적 대립 구도는, 그래서 이 책에선 넘어서야 할 고정관념이다. 저자는 각국의 여성 평화운동가들이 처한 정치적 맥락과 '위치성'에 주목한다. 민족주의나 군대에 대한 관점도 각국 여성들의 사회적 위치와 복잡한 경험에 따라 다르게 표출되는데, 저자는 "여성의 평화로운 본성" 따위를 운운하는 것보다 그 개별성을 존중하는 것에 의미를 둔다.
나라마다 폭력과 전쟁에 맞서는 방법은 다르지만, 이 책에 담긴 여성들의 저항은 진지하고 강인하다. 특히 이 저항은 기존 좌파의 가부장적 반전평화운동이 가진 폭력적 위계와 천편일률적 저항을 극복하고 있다는 점에서 희망적이다. "답답한 '붉은색'을 대신할 다층적이고 개방적이며 창조적인 '핑크빛' 반전평화운동 시대의 도래"를 이 책 속에서 목격할 수 있다.
유상호 기자 shy@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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