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은 11일이 '농업인의 날'이고, 때는 아직도 한 해 수확을 마무리해야 하는 추수의 계절인데, 풍년가가 드높아야 할 농촌 들녘은 나락 야적 시위 등으로 우울한 나날이다.
대북지원이 중단되어 쌀 재고가 100만 톤이 넘는다는데, 수입쌀까지 겹쳐, 쌀값 폭락에 농민들의 우려가 마음을 무겁게 하는 이즈음, 고려 시인 이규보의 '햅쌀의 노래(新穀行)'는 오늘에 오히려 절절한 잠언이다.
'낟알 알알이 그 얼마나 소중한가/ 사람의 죽살이도 이 낟알에 달려있네/ 농부를 존경하기 부처님을 모시듯 하네/ 굶주린 사람을 부처라 구원하랴/ 기쁘구나, 이 늙은 몸이/ 올해도 또 햇곡식을 보았으니/ 이제 죽은들 무슨 한이랴/ 농사꾼의 덕택이 이 몸에도 미쳤네'
이규보(1168~1241)는 고려시대를 대표하는 대문호로, '햅쌀'을 읊은 시제로 낟알 한 알 한 알의 생명성이 사람의 죽살이에 미침을 첫 구절로 읊어냈다.
더구나 불교를 국교로 천년을 이어온 나라에서 농부를 부처에 비기고, 부처도 할 수 없는 굶주림을 농부가 구원한다는 말은 거의 신앙의 경지이다. 단순히 가을이라 햅쌀을 노래한다는 정도의 감각으로는 도저히 미칠 수 없는 시인의 깊은 생명사상을 읽을 수 있다.
'동문 밖에서 모내기를 보면서'란 다른 시에서는 '마른 흙덩이가 푸른 이랑으로 변하기까지/ 몇 마리 소를 부리고// 바늘 같은 모가 누른 이삭으로 되기까지/ 일만 사람의 고생이 들리라'고 했다. 쌀 한 알에서 일만 사람의 생명을 보았기에 여기서도 '어찌 한 알이라도 함부로 먹으랴(一粒何忍食)'고 '한 알'의 생명성을 거듭 읊었을 터이다.
또 다른 애민시(愛民詩)로 '농사꾼에게 맑은 술과 이밥 먹기를 금지했단 말을 듣고'란 시에서는 '장안에선 구슬 같이 흰 입쌀밥을/ 개나 돼지가 먹기도 하고// 남김없이 몽땅 빼앗기고 나니/ 농부에겐 내 것이라곤 한 알도 없다'는 농촌 현실을 고발했다.
한편 '쥐를 놓아주며(放鼠)'라는 시에서는 '사람은 하늘이 낸 물건을 도둑질하고/ 너는 사람이 도둑질한 것을 도둑질하는구나'라고 쥐를 나무라면서도, 다 같이 살기 위해서 하는 짓이라며 잡은 쥐를 놓아준다고 읊었다.
여기서 '다 같이 살기 위해서(均爲口腹謀)'라고 한 뜻은 '슬견설(蝨犬說)'이란 글에서는 개ㆍ소ㆍ말 같은 짐승이나 개미와 같은 곤충들에까지 다름없는 생명관으로 이어졌다.
<한국의 생태사상> 을 낸 박희병 교수(서울대)는 이것을 '만물일류(萬物一類)' 사상이라고 했는데, 서양 사람의 생태사상으로 담을 수 없는 생명사상이 이 속에 다 들어 있다고 할 만하다. 한국의>
<살림의 경제학> 을 쓴 강수돌 교수(고려대)는 스스로 "만일 대통령이라면, 유기농업에 종사하는 농민을 특별 공무원 대접을 할 것"이라고 했다. 탁견이다. 우리 사회 모두를 먹여 살리는 생명의 일꾼들을 우리가 살려야 생명이 살기 때문이다. 살림의>
동국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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