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터 빅셀 지음ㆍ전은경 옮김/푸른숲 발행ㆍ192쪽ㆍ1만원
침대를 사진이라고, 책상을 양탄자라고 부르며 자신만의 언어세계를 구축한 한 사내. 그의 우스꽝스러운 행동을 통해 타인과의 소통이 단절된 현대인의 고독감을 그려냈던 소설 <책상은 책상이다> 로 국내에서도 많은 독자를 거느리고 있는 스위스 작가 페터 빅셀(74). 책상은>
빅셀의 새 산문집 <나는 시간이 아주 많은 어른이 되고 싶었다> 를 규정하는 동사는 '기다리다'이다. 이때 기다린다는 행위는 어떤 뚜렷한 목표가 있는 행위가 아니다. 그 기다림이란 마치 견유학파의 그것처럼 기다림 자체가 목적인 기다림이다. 초 단위, 분 단위로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를 강제하는 현대사회에서, 작가 빅셀에게 기다림이란 따라서 설렘이 아니라 고통이다. 나는>
기차가 소재인 몇 편의 산문은 기다림에 대한 빅셀의 생각을 함축한다. 글쓰기가 업인 그는 조바심으로부터 해방되기 위해 기차를 자주 타는데 그저 '타기 위해 탈 때'와 어떤 목적지를 정해놓고 탈 때의 질감은 사뭇 다르다. 전자의 경우 그는 '소박하고 각별한 감정'을 느끼지만 후자의 경우 기차에서 그가 느끼는 것은 끔찍함이다.
단지 기다림의 행위를 통해 자신의 존재의미를 찾을 수 있다고 여기는 빅셀에게, 역에 도착하려면 5분도 더 남았는데 좌석에서 벌떡 일어나 옷걸이에서 외투를 꺼내입고 100m 달리기를 하기 전 정신집중하듯 복도에 줄 서있는 승객들은 이해할 수 없는 존재다. "우리는 속도로부터 도주하려고 하나? 아니면 반대로 속도에 너무 길들여져서, 내리면서도 속도를 유지하려고 노력하는 건가?"
빅셀은 이렇게 속도ㆍ위생ㆍ규율 등으로 대변되는 현대사회의 가치를 비판적으로 바라본다. 쇼핑센터처럼 살균된 역이나, 세계화되고 규격화된 살풍경한 공항에 대해 그는 이렇게 쓴다. "우리는 환경보호를 강조하느라 세상을 보호해야 한다는 사실을 잊어버린다."
자극적인 소재와 화려하고 날선 언어 대신, 흔히 볼 수 있는 소재를 택해 수식과 장식을 뺀 언어로 메시지를 전달하는 방식은 빅셀 식 글쓰기의 특징. 낭독회에서 만난 지적 장애인들이 그 누구보다도 자신의 말을 집중해서 듣는 것을 보고 감동했다는 에피소드, 연을 잘 날리기 위해서는 부레풀이 아니라 밀가루풀을 이용해야 한다고 다정하게 알려준 어린시절 동네 형에 관한 추억 등을 그는 잔잔한 어조로 들려준다.
이왕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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