굳이 분류하자면 현빈은 '왕자님 과'다. 훤칠한 키에 귀티 물씬 풍기는 외모가 그런 이미지를 굳혔다. 널리 알려진 역할도 주로 재벌급 집안의 고귀한 자제다. 그를 스타덤에 올려놓은 TV드라마 '내 이름은 김삼순'에서 현빈은 호텔업을 하는 부유한 집안 출신의 20대 레스토랑 사장 역을 연기했다. 영화 '백만장자의 첫사랑'은 제목부터 아예 그를 범접하기 힘든 분으로 상정했다.
그러나 최근 그는 카메라 앞에서 자꾸 낮은 곳을 향하고 있다. 마치 "나는 평민"이라고 선언이라도 하려는 듯하다. 고등학교를 중퇴한 보잘 것 없는 복서(드라마 '눈의 여왕')에서 부산 뒷골목을 더 어둡게 만드는 조폭(드라마 '친구: 우리들의 전설')으로 급전직하했다. 드라마 '그들이 사는 세상'에선 다소 말쑥해졌다지만, 돈이 궁한 방송PD 역할이다.
현빈은 급기야 신작 '나는 행복합니다'에서 극심한 생활고에 시달리다 스스로가 엄청난 재력을 지닌 것으로 착각하는 과대망상증 환자 조만수로 변신한다. 형의 노름빚에 찌들고 찌든 그의 모습에서 귀공자의 자취를 찾기는 어렵다. 초점 잃은 눈빛에 침까지 질질 흘리니 일부 여성 팬들에게는 '현빈의 배반'으로 보일 만도 하다.
현빈은 "시나리오를 보고선 먼저 하겠다고 선뜻 나섰다"고 말했다. 윤종찬 감독은 "그렇게 굉장히 모던한 배우가… 믿을 수가 없었다"고 했다. "소속사가 연기 연습 시키려는 것 아닐까" 하는 의심까지 품었다.
현빈은 "시나리오를 읽고선 답답하고 우울한 마음을 갖기보다 씩 웃었다. 예전엔 못 느꼈던 감정이라 꼭 해야겠다고 마음 먹었다"고 말했다. 그의 절실한 말 한마디가 윤 감독의 마음을 움직였다. "잘 할 자신은 없습니다만 열심히 할 자신은 있습니다." 현빈의 캐스팅이 결정되면서 이발사였던 조만수의 직업은 자동차 정비공으로 바뀌었다.
그는 '열심히'라는 약속을 지키기 위해 과대망상증 환자를 만나며 배역을 탐구했다. '금으로 된 산을 소유했다'는 그 환자의 실없는 진지함에서 그는 "미친 척만 해서는 만수를 연기할 수 없고 진심을 보여야 한다"고 깨달았다. 배역에 지나치게 몰입한 탓일까. 그는 "촬영 종료 후 가장 빠져나오기 힘들었던 역할이었다"고 말했다. "이후 광고 촬영할 때 무의식 중에 눈의 초점을 잃어 애를 먹기도 했다"는 것이다.
현빈의 차기작은 '만추'다. '가족의 탄생'의 김태용 감독이 지휘봉을 든 이 영화에서 그는 '색, 계'(감독 리안)의 히로인인 중국 배우 탕웨이와 마주한다. 지금은 프린트도 남지 않은 이만희(1931~1975) 감독의 전설적인 동명 명작(1966년)을 새로 만들 이 영화에서 그는 특별 휴가를 나온 여자 모범수 애나(탕웨이)와 짧은 사랑을 나눈다. 미국 시애틀 올로케이션에 대사는 100% 영어다. 현빈은 "(영어공부) 하랄 때 안 하고… 부모님 말씀 잘 들었어야 했는데"라면서도 기대를 감추지 못했다. "'만추'는 벌써부터 큰 도전으로 느껴집니다. 어떤 결과가 나오든 저의 연기 인생에 큰 영향을 미칠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의 근황과 관련, 최근 송혜교와 사랑에 빠진 일을 빼놓을 수 없다. 그는 "둘 사이의 관계가 밖으로 드러나지 않도록 최대한 조심하고 있다"고 말했다. "대중들이 제 연기를 보며 '그 친구' 얼굴을 떠올리고, 그 친구 얼굴을 보며 저를 떠올리게 되면 분명 문제가 있는 것"이라는 생각 때문이다. 연기 욕심이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 이 배우의 꿈은 "제일 위에는 못 올라갈지언정 좀 더 넓게 연기하는 것"이다. "코미디도 할 생각입니다. 저를 자꾸 한정짓고 싶지 않아요. 어느 울타리 안에만 있으면 그 안에서 잘 노는 사람은 될 수 있겠죠. 저는 그 울타리 안을 좁게 만들고 싶지는 않습니다."
■ 영화 '나는 행복합니다'는/ 엄마는 치매, 형은 노름, 난 과대망상증…
어머니는 치매인데 형은 노름에 빠졌다. 쌀독은 비어가고, 눈이 뒤집힌 형은 돈을 내놓으라며 주먹을 휘두른다. 사채업자의 폭력이 벼랑 끝에 선 이 가정을 덮친다. 등이 꺾일 듯한 삶의 무게를 견디지 못한 자동차 정비공 만수(현빈)는 과대망상증이라는 자신만의 낙원으로 도망친다. 아무 종이에나 액수와 사인을 휘갈기며 대부호가 됐다는 착각에 빠지는 만수는 행복감에 젖고, 정신병원은 그를 정상으로 되돌리려 한다.
'소름'과 '청연'으로 빼어난 연출력을 선보였던 윤종찬 감독의 신작이다. 말기 암에 걸린 아버지 때문에 돈과 연인과 삶의 여유를 뺏겨 미치기 일보직전인 간호사 수경(이보영)의 일상이, 정신을 놓은 만수와 강한 콘트라스트를 이룬다.
과연 인간의 행복은 무엇인가라는 근원적이며 제법 묵직한 질문을 던지는 영화. 삶의 아이러니를 낚아챈 연출력이 돋보인다. 소설가 고 이청준의 동명 단편소설을 밑그림 삼았다. 윤 감독은 "사회적 문제점을 지적하기보다 그저 인간의 한 모습을 그리고 싶었다"고 말했다. 26일 개봉, 15세 관람가.
라제기 기자 wenders@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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