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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의 풍경, 2009] <5> 책, 디지털을 만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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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의 풍경, 2009] <5> 책, 디지털을 만나다

입력
2009.11.19 00: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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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책(冊)'은 본래 끈으로 대나무를 엮은 모습을 뜬 상형글자다. 그러나 후한 시대 제지술이 확립된 후 2,000년 동안 책은 종이와 떼 놓고는 생각할 수 없는 존재였다. 사상이나 지식, 감정 따위의 집적을 머릿속에 그릴 때, 으레 떠오르는 것은 종이라는 매질의 촉감이다. 하지만 '인간의 정신과 종이'의 이 오랜 결속도 무너질 날이 닥쳐왔는데, 종이를 대체하고 있는 것은 디지털이라는 새로운 문명의 코드다.

6인치 화면 속으로 들어간 출판시장

세계 최대의 온라인서점 아마존은 올해 3분기 깜짝 놀랄 성장을 기록했다. 지난해 같은 기간에 비해 매출은 28%, 순이익은 68%나 급증했다. 미국출판협회(AAP)에 따르면 미국의 전체 출판시장은 2004년 이후 매년 230억~240억 달러(매출액 기준) 규모로 큰 변화가 없다. 그럼에도 아마존이 이렇게 성장한 것은 2007년 11월 시작한 전자책(e-Book) 서비스와 전용 단말기 '킨들' 덕이라는 것이 지배적 분석이다. 6인치(15cm) 크기 화면에 무게 292g의 킨들은 전자책을 의미하는 새 시대의 아이콘으로 자리잡았다.

토크쇼의 여왕 오프라 윈프리가 "애장품 1호"로 애지중지한다는 이 물건은 2년 만에 100만대 이상 팔려나갔다. 전자책 서비스를 하는 책이 아마존 전체 도서 매출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현재 35%에 이른다. 킨들의 콘텐츠 판매액은 올해 1억 9,000만 달러, 내년에는 6억 달러에 이를 것으로 전망된다. 미국 전체 통계를 보더라도 올해 2분기 전자책 도매 매출액은 지난해 같은 기간에 비해 3배 이상 늘었다.

책이 '글씨가 쓰여진 종이 묶음'에서 '단말기에 담긴 디지털 콘텐츠'로 탈태하는 것은 미국만의 풍경이 아니다. 한국전자출판협회에 따르면 2006~2011년 전자책 시장의 연평균 성장률은 미국이 23.9%로 예측되는데 비해, 유럽은 57.9%, 일본은 59.3%, 중국은 75.0%에 이를 것으로 예상된다. 지난해 세계 최대의 도서전인 프랑크푸르트 국제도서전에 참가한 세계의 출판인들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에서는 응답자의 40%가 "2018년부터 디지털 콘텐츠의 매출이 인쇄된 책의 매출을 넘어설 것"이라고 답했다.

한국에서도 전자책 서비스가 본격화하고 있다. 6만 종의 전자책 콘텐츠를 확보하고 있는 교보문고는 올해 삼성전자의 전용 단말기 '파피루스' 출시에 맞춰 서비스 확대를 꾀하고 있다. 예스24, 인터파크 등도 내년부터 서비스를 본격화할 움직임이다. 유통업체, 출판사 등이 공동출자해 지난 9월 출범한 한국이퍼브는 10만 종 이상의 전자책 콘텐츠 확보를 목표로 사업을 벌이고 있다. 올해 국내 전자책 시장은 4,000억원 규모인데, 2012년엔 2조 4,000억원에 이를 것으로 전망된다.

'유비쿼터스 오거서(五車書)'가 될 수 있을까

그런데 디지털 문명의 얼리 어답터 국가인 한국이지만, 전자책이 보편화하는 속도만큼은 외국에 비해 더디다. 인터파크 이북사업부 박종환 팀장은 그 원인을 "아마존이나 애플 등 해외 업체들이 휴대성에 초점을 맞춰 전자책 사업을 전개한 데 반해, 한국의 초창기 업체들은 PC 기반의 웹서비스에 중점을 뒀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손에 들고 읽는 매체'라는 책의 본질을 건드리지 않고 단말기를 개발해온 외국 업체와는 다른 접근이었는데 한국 업체들의 이런 시도는 결국 실패로 끝났다. 박 팀장은 "시장이 형성되지 않았기 때문에 출판사들도 디지털라이징에 소극적일 수밖에 없었다"고 덧붙였다.

아직 전자책을 종이책의 보완재 정도로 여기는 출판계의 인식도 벽이다. 미국의 경우 스티븐 킹 등 인기 작가의 작품을 출간과 동시에 전자책 콘텐츠로 구입할 수 있는데 비해, 한국의 신간 베스트셀러가 전자책 제공 대상에 포함되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교보문고의 경우 신간의 전자책 서비스를 확대하고 있다지만, 전체 200만 종 가운데 전자책으로 볼 수 있는 책은 6만 종에 불과하다. 메이저 출판사를 중심으로 전자책 판매 조건을 판권 계약에 명기하는 경우도 있지만, 대부분은 아직 전자책 판권에 대한 개념조차 생소하다.

한국 출판시장에서 교재와 학습지 등이 큰 비중을 차지하는 점, 해외 번역서가 30%를 넘는 점 등도 전자책 콘텐츠 확보를 어렵게 만드는 환경이다. 또한 디지털화한 문화콘텐츠를 '공짜'로 인식하는 대중의 태도, 평균 종이책 가격의 60~70%에 이르는 비싼 전자책 콘텐츠 가격도 넘어야 할 장벽이다. 이 때문에 콘텐츠 빈곤과 출판사 양극화 등 국내 출판시장의 고질적 문제가 전자책 시장에서 더 커질 수도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전자책 시장의 유통 채널은 종이책보다 훨씬 더 좁기 때문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높은 벽은 한국인의 남부끄러운 독서량이다. 만화와 잡지를 포함해 한국인이 한 달에 읽는 책은 평균 0.9권. 전자책 인프라가 구축된다고 해도 오프라인 시장의 불황만 옮겨갈 공산이 크다. 전자책이라는 새로운 플랫폼에 맞는 콘텐츠의 성격 규정과 새로운 차원의 읽을거리 개발 고민이 우선되어야 하는 이유다. 박종환 팀장은 "종이책과는 다른 콘셉트와 레이아웃을 가진 책들을 기획, 제작하는 노력이 필요할 것"이라고 말했다.

'책의 진화와 디지털 출판의 미래'를 주제로 19일 파주북시티에서 개막하는 국제출판포럼에 참석하기 위해 방한한 미국의 미래학자 제임스 테이터 하와이대 미래학연구소장은 "인류의 의사소통에서 '읽고 쓰는' 행위 자체가 쇠퇴하고 있는 중"이라면서 "디지털 출판 이후 시대에는 인간의 오감을 활용한 확장된 형태의 의사사통이 득세할 것"이라고 밝혔다.

유상호기자 shy@hk.co.kr

■ '나비' '뿔' 등 온라인 웹진 봇물소설연재·서평 등 소통의 매체로

올해 출판계의 우울한 소식 가운데 하나는 계간지들의 잇단 정ㆍ휴간이다. 종합 계간지 '비평'과 문학 전문 계간지 '문학수첩' 등이 발행을 멈췄다. 반면 웹진 형태의 온라인 전문지들은 활성화, 계간지들이 담당했던 담론 공간의 역할을 하고 있다. 단행본 시장에 비해 '디지털라이징(digitaliging)'이 훨씬 이른 셈이다.

인터넷서점 예스24는 지난 7월부터 문화웹진 '나비'를 운영하고 있다. 도정일 경희대 명예교수와 소설가 황석영씨가 공동 편집인을 맡고 있다. 이들은 ▦한국 문학의 질적 성장과 대중화 ▦소통ㆍ대화ㆍ교환의 문화마당 ▦양질의 지적 자산 생산과 축적 등을 창간 취지로 밝혔다. 각종 기획과 연재, 서평 등을 싣고 있는데 내용과 양에 있어서 기존 종이책 종합 계간지에 뒤지지 않는다.

웅진씽크빅 단행본 개발본부가 올해 7월 창간한 '문학웹진 뿔'도 있다. 현재 이제하, 구효서, 오현종, 보리스 싸빈꼬프의 장편소설이 연재 중이며 여러 작가의 단편소설과 시, 에세이가 매일 '업데이트'되고 있다. 자문위원인 문학평론가 이경호씨는 "90년을 맞이한 한국 문예지는 새로운 전기를 맞이했다"며 "단순히 읽는 잡지에서 온몸으로 소통하는 잡지로의 변화가 목표"라고 말했다.

유상호기자 shy@hk.co.kr

■ 한국출판문화상 역대 수상자 인터뷰, '한국문학통사'로 27회 저술상 받은 조동일 교수

"기존에 국문학사를 다룬 저술은 모두 단 한 권으로 쓰였지요. 한데 제 책은 여섯 권에 이릅니다. 구비문학부터 현대문학에 이르는 방대한 분량을 소화한 것도, 세계 문학사적 관점에서 우리 문학을 서술한 것도 처음입니다."

<한국문학통사> (전6권ㆍ지식산업사 발행)로 1986년 제27회 한국출판문화상 저술상을 수상한 조동일(70) 서울대 명예교수는 "특별한 계기는 없었다. 국문학자 누군가는 이 작업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고 그것이 나였던 것"이라고 이 방대한 책을 쓴 계기를 말했다. 당시 한국출판문화상 심사위원들은 '방대한 영역과 분량을 다루면서도 치밀한 구성과 정연한 논리 전개에서 벗어나지 않는다'고 평했는데, 조 교수의 이 책은 학계는 물론 일반 대중에게도 신선한 충격을 줬다. 학술서임에도 소설책처럼 재미있게 읽힌다는 말이 돌았고, 1~5권이 무려 5만질 가량 팔렸다.

그때까지만 해도 국문학계는 근대 이후의 문학은 서구에서 이식된 것을 주류로 여기고 연구, 교육했다. 조 교수는 자신의 저서에서 근대의 가사문학과 판소리문학 등을 재조명함으로써 자생적인 근대 문학을 강조했다. 전통과 현대문학이 단절된 당시 국문학의 한계를 극복해낸 접근이었다. 동아시아 문학, 나아가 세계문학사에 입각한 일반 이론을 국문학에 적용한 것도 우리 문학의 영역을 넓히는 데 큰 몫을 했다.

이 책이 완간된 것은 1988년이지만 이후에도 조 교수는 1989, 1994, 2005년 세 차례에 걸쳐 개정판을 냈다. 그 사이 새로 발굴한 자료와 연구성과를 반영하기 위해서였다. 그는 계속적인 개정 작업에 대해 "첫째는 살아있는 동안 저작물에 대해 무한책임을 져야 한다는 학자적 마인드, 둘째는 이 책이 내 개인의 것이 아닌 독자와 긴밀히 연결된 공동의 과업인 만큼 이에 부응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그는 "초판의 문장 하나를 그대로 둔 게 없을 정도로 온 노력을 쏟았다"고 털어놓으면서 "하지만 이제는 너무 힘이 들어 더 개정할 계획은 없다"고 말했다.

<한국문학통사> 는 지난달 말 제9회 동아시아출판인대회에서 한ㆍ중ㆍ일ㆍ대만ㆍ홍콩 출판인들이 선정해 발표된 '동아시아 100권의 책'에 뽑혀 다시 그 위상을 확인했다. 2002년에는 다니엘 부쉐 전 파리7대학 한국학연구소장의 번역 및 요약으로 프랑스에 소개됐고, 영어판은 서울대에서 고전문학 석ㆍ박사 과정을 마친 미국 학자 찰스 라슈르의 번역으로 영국에서 곧 출간될 예정이다. 조 교수는 "프랑스어판과 영어판 출간은 대산문화재단, 한국학중앙연구원에서 도움을 받았지만 중국어판은 사정상 내지 못하고 있다. 도움이 절실하다"고 말했다. "앞으로 일어판을 낼 인재도 찾을 것"이라는 그는 "연구발표는 벅차지만 강연은 국내외로 꾸준히 다니고 있다"고 근황을 전했다.

김혜경 기자 thanks@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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