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서울고등법원은 딸을 성폭행한 의붓아비의 선처를 바란 엄마의 뜻을 참작해서 가해자에게 최저형량을 선고했다. 이 엄마는 아이 둘을 데리고 문제의 아비와 동거를 시작했는데, 어느날 부부싸움을 하고 남편이 집을 나갔다. PC방에 간 남편이 걱정되어서 엄마는 열살짜리 딸과 여섯살짜리 아들에게 도시락을 들려보냈더니 아들은 돌아왔고 딸은 성폭행을 당한 뒤 의붓아비가 잠든 틈을 타서 뒤늦게 돌아왔다. 남편을 신고한 엄마는 최근에 의붓아비와 사이에 생긴 셋째를 낳았는데, 남편 없이 아이 셋과 사는 고통이 너무 힘들다며 새출발하게 도와달라고 호소했다고 한다. 인터넷을 타고 널리 퍼진 어느 신문의 기사는 제목이 <"딸 성폭행 남편 선처" 누가 이 엄마에 돌을…>이었다. 다른 신문에도 비슷한 기사가 실렸다. 누가 이 엄마에게 돌을 던지냐고? 내가 던지겠다.
남편 선처보다 생계비 확보
이 엄마에게도, '엄마'가 하는 행위는 옳다고 주장하려는 판사에게도, 기자에게도, 이걸 믿는 모든 이들에게도 돌을 던지겠다. '엄마'지상주의는 한국사회가 빨리 깨어나야 하는 미신이다.
이 기사에 따르면 이 엄마는 기초생활수급자로서 다달이 받는 40만원의 수입이 전부라 남편이 돌아오는 것이 세 아이와 사는 데 낫다고 주장한 것으로 되어 있다. 생존도 보장이 안되는 처지에서 생활을 이야기할 수는 없다는 주장이다. 국민기초생활보장법에 따르면 아이 셋이 딸린 기초생활수급자는 월 132만원(현금으로는 110만원)의 지원을 받도록 되어 있다. 물론 이 돈으로도 아이 셋을 데리고 사는 것이 쉽지는 않다. 그러나 딸을 성폭행한 남편을 용서해달라고 할 정도로 비참한 굴레는 아니다. 만일 이만한 지원을 받지 못하고 있다면 그것은 엄마가 지방자치단체와 싸워서 받아내야할 몫이지, 가해자를 풀어달라고 해서 해결할 문제가 아니다. 이걸 이 사람에게 일깨워줄 인권운동가가 한 명도 없었다는 것이 참 안타깝다.
더욱 끔찍한 것은 딸까지 그걸 바란다는 듯한 말이다. "딸아이는 엄마인 저보다 잘 극복했고 제가 고통스러워할 때 오히려 저를 위로했습니다." 어른이 어른인 것은 아이로서는 모르는 것을 헤아려줄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아이는 아직 스스로 겪은 일이 무엇인지 모른다. 그 상황을 두고 피해의식을 심어주어도 문제겠지만 열 살짜리 딸이 서른아홉살짜리 자신을 위로해주었다는 점을 들어 딸이 이 상황을 극복한 것으로 보는 것이야말로 심각한 문제이다. 아이는 엄마가 불행하지 않게 되길 바랄 뿐이다. 울고 힘들어하는 엄마를 위로하고 싶다. 어린이니까 그렇다. 그 마음을 그대로 받아들여서 어른이 아이의 위로에 기대면서 아이가 받아야할 보호조치를 외면한다면 정말 끔찍한 일이다. 문제의 아비가 출소했을 때 아이는 열 세살이 된다. 그리고 그를 폭행한 사람과 다시 한 집에서 살아야 한다. 이것이 엄마가 아이를 내세워 선처를 주장할 일인가.
판사는 '엄마'의 선처호소를 받아들이는 이유를 이렇게 댔다. "세 아이의 엄마로서 본능적으로 무엇이 가장 최선의 해결 방안이 될 것인지를 감지할 수 있을 것이다." 엄마의 본능이 그렇게 정확하다면 어린 딸에게 도시락을 들려 남편에게 찾아가게 했겠는가.
아이가 엄마 위로해서야
멕시코의 한 가계를 통해 빈민문화의 실상을 그대로 알린 인류학의 고전 <산체스네 아이들> 에는 빈곤층의 성윤리가 중산층과는 확연히 다른 것으로 나온다. 어쩌면 이 엄마의 행위는 계층별 행동문화가 다르지 않던 한국사회에 빈곤계층의 성문화가 나타나는 조짐으로 봐야 할지도 모르겠다. 어떤 경우에도 이 엄마의 행위를 '가족을 살리려는 엄마의 본능'으로 미화해서는 안되다. 산체스네>
판사의 말대로 모든 집안에는, 모든 범죄에는 개별적 상황이 존재한다. 그러나 어떤 상황에서든사회가 가장 힘써서 지켜줘야 하는 것은 가장 약한 이의 인권이다. 아이에게 무엇이 가장 올바른 선택인가. '엄마'는 제발 남편이 감옥에 갇혀있을 3년6개월동안 남편을 떨쳐버리고 자립할 능력을 갖추길 빈다. 그 자립을 사회는 도와줘야 한다. '엄마'의 실체가 무엇이든.
서화숙 편집위원 hssuh@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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