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는 재미의 발견

새로워진 한국일보로그인/회원가입

  • 관심과 취향에 맞게 내맘대로 메인 뉴스 설정
  • 구독한 콘텐츠는 마이페이지에서 한번에 모아보기
  • 속보, 단독은 물론 관심기사와 활동내역까지 알림
자세히보기
[김연수의 시로 여는 아침] 여름이 남기고 간 선물
알림
알림
  • 알림이 없습니다

[김연수의 시로 여는 아침] 여름이 남기고 간 선물

입력
2009.11.17 23:36
0 0

그 해 여름 우린 어딘지 서로를 위해 존재하는 오누이 같았다

섬은 목책 없이 이어진 산책길, 새벽안개가 사라질 때까지 생령들은 소근대며 피어올랐다 이파리가 물속에 잠겨 있는 버드나무 밑동을 파헤치고 늙은 개가 새끼를 낳고 있었다 다가가면 백합조개 깨진 껍질들만 가득했다

무너진 집 돌담 밑에서 이름이 지워진 수첩을 발견했다 엑스표는 많았지만 동그라미는 없었다 10년 전의 것이라고는 믿어지지 않았다

가묘를 파헤치고 육탈이 끝난 아이들의 뼈를 옮겼던 날에는 섬사람들을 따라 해안가를 걸었다 제를 올리고 우리는 기름이 적은 육고기를 나누어 먹었다 씹을수록 너의 옷섶으로 뿌옇게 배어나왔던 젖물

바람이 불고 배를 띄우고 물속에 뛰어든 네가 다시 돌아와 웃고 있었다 우린 손을 잡고 간수를 빠져나가기를 기다리며 세워둔 소금자루처럼 앉아 있었다

촛불은 흔들리고 꽃등은 밤마다 위를 둥실둥실 떠가고

깨진 거울을 주워 모았고 수은을 벗겨내 서로의 얼굴에 고운 가루를 발라주었던 날, 마호병에서 온수를 따라 세 번 나누어 마셨다 폭풍 치는 마지막 밤에도 서로의 귓속에 따뜻한 입김을 불어넣었다 사랑하는 일만 남아 있다고 믿기엔 우린 어딘지 이 세상 사람이 아닌 것 같았다

● 사랑을 할 때 우리는 여름 안에 있었구요, 사랑을 할 때 우리는 섬 안에 있었구요, 사랑을 할 때 우리는 낯선 풍습을 가진 사람들 사이에 있었지요. 그건 조금 있으면 조금 있으면 멸망할 세계예요. 우리는 더 이상 뜨거워지지 않을 것이며, 우리는 더 이상 둘만의 섬에 있지 않을 것이고, 우리는 더 이상 우리를 둘러싼 모든 것들을 처음 보는 것인 양 바라보지 않을 테니까요.

늦든 빠르든 우리는 세계의 종말을 보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잠깐 존재했다가 사라지는 섬이기 때문에, 또 그렇게 아름다웠던 것이죠. 이 시는 정말 아름다워요.

소설가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세상을 보는 균형, 한국일보Copyright ⓒ Hankookilbo 신문 구독신청

LIVE ISSUE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

0 / 250
중복 선택 불가 안내

이미 공감 표현을 선택하신
기사입니다. 변경을 원하시면 취소
후 다시 선택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