벚꽃 가득 찬 화면으로 스크린이 열렸다. 화사하게 피었다가 조락하는 벚꽃과 달리 세월과 공간을 초월한 서민의 흥겨운 웃음과 스산한 눈물이 교차했다. 서울 소격동의 예술영화전용관 씨네코드 선재에서 만난 일본영화 '남자는 괴로워'의 1편은 그렇게 영화사에 남긴 전설의 한 자락을 보여줬다.
1969년 스크린에 첫 영사된 '남자는 괴로워'는 속편에 속편을 거듭하며 48편이나 만들어졌다. 한때 세계 최장의 영화 시리즈로 기네스북에 기록된, 일본의 국민영화였다. 하지만 매년 두 차례 꼴로 열도를 흥분시킨 이 전대미문의 시리즈는 1995년 영영 끝을 맺었다. 천방지축의 사고뭉치인 주인공 도라를 매번 연기한 아츠미 기요시(1928~1996)가 암으로 삶을 마감했기 때문이다.
작은 눈에 작은 키, 어눌하면서도 성마른 성격의 도라는 아츠미 그 자체였다. 일본인들이 그의 죽음을 도라의 죽음으로 해석하며 애통해 했다 하니 배우로서는 참 행복한 삶을 살다 갔다는 생각이 든다.
배역과 배우의 구분이 잘 안 가기는 TV시리즈 '형사 콜롬보'로 유명한 피터 포크도 마찬가지 일듯 싶다. 포크는 독일 빔 벤더스 감독의 '베를린 천사의 시'(1987)에서 영화 촬영을 위해 베를린을 찾은 자신 피터 포크 역을 연기한다. 길가에서 그를 마주친 영화 속 독일 청년들은 잠시 놀란 표정을 짓다가 이내 제 갈 길을 간다. "설마… 콜롬보일리 없어. 더러운 코트를 입지도 않았잖아." 그들을 바라보는 포크의 눈엔 자신의 연기에 대한 자부심과 또 다른 배역에 대한 아쉬움 등 만감이 교차한다.
'닌자 어쌔신'으로 첫 할리우드 주연 자리에 오른 비의 몸이 화제다. 그는 닌자로 거듭나기 위해 8개월간 복싱, 가라데, 우슈 등 온갖 무예를 닥치는 대로 배웠다. 그는 "각진 근육을 만들기 위해 소금과 설탕을 전혀 먹지 않았다"고 했다. "(촬영장이었던 베를린의 거리를 거닐 때)누군가 저를 째려보면 그 시선을 전혀 피하지 않을 정도로 몸에 자신이 있었다. '격투기 대회 나가볼까'라는 우스개도 곧잘 던졌다"고도 말했다.
독종이라 익히 소문난 그가 그렇게 당당한 자신감을 보일 정도이니 영화제작 기간 동안 살인병기인 닌자 그 자체가 된듯하다. 그래서일까. 비가 연기한 라이조는 '닌자 어쌔신'의 후편 제작이 벌써 기다려질 정도로 강렬한 인상을 남긴다. "어린 게 나의 무기"라며 배역을 위해서라면 언제든 자신을 버릴 준비가 돼 있는 비에게 대성을 예상하는 게 섣부른 기대만은 아닐 듯 하다.
라제기 기자 wenders@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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