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바다의 반짝이는 수평선, 어두운 소나무 숲 속에 드리운 햇빛, 하얗게 부서지는 파도. 가까이 다가서서 보면 캔버스 가득 촘촘하게 못이 박혀있다. 못들은 조명이나 보는 각도에 따라 그 반짝임을 달리하면서 수많은 변화와 움직임을 이끌어낸다. 서울 신사동 갤러리현대 강남에서 개인전을 열고 있는 유봉상(50)씨는 이처럼 차가운 금속못으로 서정적인 풍경화를 만들어내는 작가다. 프랑스의 한 평론가는 그의 작품에 대해 "못으로 빛을 걸었다"고 표현했다.
그가 한 편의 풍경화를 '그리는' 데는 길이 15㎜의 핀못이 평균 7만개 들어간다. 못을 박는 데만 꼬박 5일이 걸린다. 과정도 간단치 않다. 먼저 풍경을 촬영하고 캔버스 천에 이미지를 출력한 뒤 나무 위에 고정시킨다. 그 이미지에 맞게 못을 박은 뒤 아크릴 물감을 분사하고 다시 못 윗부분을 갈아내기까지, 한 치의 오차도 허용되지 않는 정교한 작업이다.
유씨가 본격적으로 못 작업을 시작한 것은 10여년 전. 본래 작은 캔버스에 추상적인 단색 회화를 그리던 그는 납판이나 흙, 알루미늄 등으로 재료 실험을 하던 중 못을 이용했을 때 그림에 어떤 리듬감이 생기는 것을 발견했다. 못을 사용하면서 추상적이던 그의 그림은 자연스럽게 구체적 형상으로 바뀌었다.
"못이 몇 개나 박혔는지, 시간이 얼마나 걸리는지에 대한 '동정 섞인' 질문을 많이 받는다"는 그는 "무식한 끈기와 시간을 필요로 하는 작업이긴 하지만 사실 가장 고생스러운 일은 어떤 이미지를 화면에 앉힐까 정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못이 흔한 미술 재료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새로운 것도 아니죠. 그것을 어떻게 표현하느냐, 또 무엇을 만들어내느냐가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유씨는 1990년 이후 프랑스에서 작업하다 지난해 귀국해 영은미술관의 레지던시 입주작가로 작업하고 있다. 이번 전시에서는 프랑스의 성당과 바다, 강원도의 나무와 숲 등을 담은 신작 20여점을 선보이고 있다. 29일까지. (02)519-0800
김지원 기자 eddi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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